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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李原庚)

예술가명
이원경(李原庚)
전공
연출
개요
어려서부터 미술을 공부했으며,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까지 떠났던 이원경이 연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다. 일본 전람회나 선전(鮮展)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던 그가 대학에 다니고 있던 1938년쯤 축지소극장에 가보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화가 지망생인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연극을 본 그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극예술연구회 제5주년 기념공연으로 <춘향전>이 무대에 오르게 되었을 때, 이원경은 무대장치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였다. 미술적 안목으로 연극에 참여함으로써 미술과 연극의 조화를 교묘하게 이루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때 함께 활동한 사람들로는 주영섭, 이해랑, 김동원, 김진수, 이광래 등이 있다. 1938년 일본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원경은 축지소극장 신축지극단 미술부에 입단하여 실력을 다지는 한편, 1940년에는 일본 동경 아테네 프랑세즈에서 3년 공부하고 수료하였다. 그가 연극에 몸담게 된 두 번째 동기는 1941년에 만들어진 현대극장의 동인이 되면서부터다. 현대극장은 창립 공연작으로 유치진 작 <흑룡강>을 택하였다. 주영섭이 연출한 이 공연에서 이원경은 무대장치를 맡았다. 그러던 그가 1942년에는 <해적 프리헤이즈>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등장한다. 그가 <국민문학>이라는 잡지에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에 훗날 친일 관련하여 여러 말들이 생겨났다. 광복 후 이원경은 일제 말기에 연극활동을 한 것은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자책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광복 이후 6·25전쟁이 날 때까지는 자숙하는 의미에서 연극을 하지 않고 미술을 응용한 실내장식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6·25전쟁이 나던 해 국립극장이 만들어지고, 유치진이 극장장이 되었다가 1·4후퇴로 인해 국립극장이 대구 문화극장으로 지정되자, 이원경은 대구에서 국립극장에 참여한다. 1960년대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지내던 그는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우리나라 소극장 운동에 새 길을 열어 놓는다. 1976년 4월에 삼일로 창고극장을 창설하여 1983년까지 대표로 활동한 그는 새롭고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해 많은 힘을 쏟는다. 또한 공연법으로 소극장의 존폐가 기로에 섰을 때, 이원경은 앞장서서 공연법 개정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그 덕택으로 동숭동 일대에는 소극장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랑연극상을 수상했다. 이원경은 지금까지 약 100여 편에 달하는 연극을 연출했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인지 그의 무대는 감각적이고 시각적인 요소들이 강조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요소 못지않게 배우들이 지켜야할 화술에 대해서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우리말은 한자말이 많은 관계로 평성, 상성, 거성, 입성 등 소리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이 분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극 대사에서 그런 것이 확연히 구분되는 경우가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2003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과 함께 <이원경 연극화술론>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88년 일본극단 ‘발견의 회(發見の會)’에서 공연한 <귀두혹상(鬼頭惑象)> 연출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연극 활동을 마쳤다.
생애와 약력
연도미상 교동보통학교 졸업 1929년 제일고보(경기고등학교의 전신) 1938년 일본 데코쿠미술학교 서양화학과 졸업 / 일본 동경 아테네 프랑세즈 수료 1940년 일본 동경천서화학교 연구과 2년 수료 / 일본 동경축지소극장 소속 신축지극단 미술부 입단 1941년 극단 현대극장 창단 동인(대표 유치진, 연출부장 주영섭, 무대부장 이원경) 1943년 평양 청명(淸明)극단 창립 1952년 국립극장 기획위원 1953년 민예극단 창단 1955년 서라벌예술학교 연극과 교수 1960년 국립극장 운영위원 1961년 예그린악단 기획실 실장 1963년~1970년 드라마센터 서울연극학교 강사 1971년~1978년 중앙대 예술대 대우교수 1976년~1983년 삼일로 창고극장 설립, 대표 1978년 예술원 회원(연극) 1981년 중앙대 객원교수 1989년 예술원 종신회원
상훈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상 / 중앙문화대상 1982년 은관문화훈장 / 동랑연극상 198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작품활동
1938년 <춘향전> 극예술연구회, 무대장치 담당 1940년 <무영탑> 현진건 원작, 함세덕 각색, 유치진 연출, 극단 고협, 무대장치 담당 1941년 <흑룡강> 극단 현대극장, 무대장치 담당 연도미상 <조춘(早春)> 극단 현대극장 3회 공연작, 무대장치 담당 1943년 <해적 프리베이즈〉(1943. 5~6 <국민문학>) 일문 1952년 <격분〉(1952. 극단 신청년) 1954년 <파랑새> 명동 시공관, 연출 1955년 <수선화〉(1955. 국립극단) 1960년 <심청전> 국립창극단, 연출 1969년 <김대건 신부〉발표 / <해결되지 않는…〉발표 1970년 <한여름밤의 꿈> 서라벌예대, 연출 1972년 <백의종군〉연출(중앙대 예술대) 1976년 <춘향전> 국립창극단, 연출 1978년 <오델로> 드라마센터, 연출 1988년 <귀두혹상(鬼頭惑象)> 일본 극단 ‘발견의 회’, 연출
대표작품
<춘향전> <흑룡강> <무영탑> <해적 프리베이즈> <파랑새> 희곡 <불멸의 처>
저서
<연극연출론>, 이원경, 1976 <이원경 연극연출론>, 이원경, 현대미학사, 1997 <불멸의 처>, 이원경, 평민사, 1999 <이원경 연극화술론>, 이원경,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2003 ‘한문권의 한국과 일본의 언어 및 TV방송 화술의 문제점들’, 이원경, <한국연극>, 1998년 11월
리뷰
(……) 그에게 연극은 한 시대와 함께 이를 맞물고 도는 톱니바퀴다. 사회상은 어떻게든 연극에 반영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애초 연극을 통해 말하는 바는 행위자의 정신과 실천을 비추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연극은 종합예술이다’라는 18세기 바그너 이후의 가설을 철회한다. “종합이라면 이것저것의 개성을 존중해야 하는데, 그러면 연출이 할 일이 얼마 없어져. 내 연출론은 모든 개성을 살린다기보다 음식을 만드는 끝에 파와 마늘을 넣어 조물락거리는 것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강렬한 하나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지.” 무대미술로 연극을 시작한 그가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기에 이르면서 그는 몇 가지 지평을 개척했다. 우선은 흔히 실험극적 시도로 불리는 그의 연출작업이다. “그건 잘못된 정보야. 난 실험한 적이 없어. 아마 미술을 했기 때문에 감각적인 것이 무대 위에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랫동안 화술을 연구하고 가르쳐왔다. “우리말에는 음운과 리듬이 있어. 음운은 소리로 치면 물의 흐름처럼 꾸불텅 꾸불텅 하는 거야. 그리고, 제일 느린 진양조, 조금 빠른 중모리, 빠른 중중모리, 가장 빠른 휘모리와 같은 리듬이 말의 어떤 흐름을 구성하지. 이 음운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사실은 중국의 한자가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중국의 사성이 우리말에 스며들게 된다는 점이야.” (……) - <불멸의 처>, 이원경, 평민사, 1999
창작노트
(……) “연극을 하려는 젊은이들은 왜 내가 연극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반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연극은 시대의 영향을 받고, 연극을 늘 변화한다고 믿어왔습니다. 해방 이후, 군부독재시절은 우리 연극을 나쁘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예술의 사명과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연극의 이용을 그리 찬성하지 않습니다. 연극은 그 어떤 시대에서도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데, 그 힘은 보는 이에게 주는 감동으로 나옵니다. 연극은 한마디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연극에 기승전결이라는 규칙이 있듯이, 연극을 만드는 이들은 규칙에 따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연극은 이 규칙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래서 연극을 포기했습니다. 12년 전에. 다시 말하면, 야무지게, 정확하게 자기자신에게 질문하세요. 왜 연극을 해야 하는지를. 자기기만은 안 됩니다. 이것이 자기를 아끼는 일입니다.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는 지금,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가 더욱 중요할 따름입니다.”(……) “한마디로 거짓말로 연극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요. 비양심적인 연극이 너무 많아요. 1983년 창고극장을 그만 두면서 연극을 그만 둔 것은 나이 탓도 있지만, 너무 오래하는 것이 싫었어요. 그리고 연극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연극이 형편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연극을 해서는 안됩니다. 연극하는 이들은 생각하는 바를 가식이 아니라 깨끗하게 제 것으로 드러내놓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화려한 꽃보다는 들판에 피어있는 이름 없는 꽃들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인생의 깨끗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지니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난 남이 한 것을 본받고 싶지 않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싶고, 해놓은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술가로서. 예를 들면, 공연이 시작되고 나서도 끊임없이 고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경향은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던 유치진, 이해랑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 같은 것인데, 이들은 닷새 공연하면 닷새 내내 뜯어 고쳤습니다. 나는 희곡을 읽다가 드문드문 튀는 부분을 강조하고 이어나가는 작업을 연출의 중심으로 삼았더랍니다. 난 실험적이지 않았을 뿐더러, 첫날 올라간 공연은 끝까지 지속하도록 고치지 않았습니다. 공연은 나무나 대나무 칼이 아니라 진검으로 단 한번에 승부하는 것과 같아요. 공연은 자식처럼 태어나 그대로 자라는 것입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만들 수 없지요. 연극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연극하는 이가 예술가가 될 때입니다.” - ‘원로예술인에게 듣는다-은둔하는 한국연극계의 거목 이원경’, 안치운, <문화예술>, 2001년 6월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2000 ‘나의 연극기행’, 이원경, <한국연극>, 1981년 7월~1982년 3월 ‘증언으로 찾는 연극사 4’, 김미도, <한국연극>, 1992년 10월~11월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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