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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종(卞基種)

예술가명
변기종(卞基種)
전공
연기
개요
변기종은 우리나라 신극운동 100년 동안 가장 오래 무대를 지킨 배우이다. 1859년 7월 29일 서울 인사동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소상인이었던 부친의 덕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천주교 계열 계성학교의 전신인 명동성당 부설학교를 다녔다. 한문서당이 개화물결을 타고 신식학교로 바뀌자 그곳에서 고등과까지 마치게 된다. 그러던 그가 연극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친구들과 우연히 연흥사(演興社)에서 하는 혁신단(革新團)의 <진중설>(陣中雪)을 보고나서부터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일본의 군사극으로 일본 특유의 애국주의를 고취한 작품이다. 1912년 18세의 나이로 박창한(朴昌漢)이 이끄는 신파극단 청년파일단(靑年派一團)에 가입한 그는 본명인 창규(昌圭) 대신 기종이란 예명으로 연극 여정을 시작한다. 재정적으로 부족했던 청년파일단은 순회공연 당시 평양에서 단장이 도주하는 바람에 해산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 이기세(李基世)의 유일단(唯一團)이 순회공연을 오면서 그 극단에 가담하게 된다. 후에 이기세와 예성좌(藝星座)를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문예단에서 활동하다가 김도산이 이끄는 신극좌에서 활동을 한다. 그러다 1년 뒤 김도산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25세의 나이로 신극좌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신극좌도 얼마 가지 않아 해산하고 만다. 1920년대 들어 동경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토월회가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그에 대항하여 신파극배우들을 모아 민립극단을 만들어 활동한다. 그러나 이 극단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흩어지고 만다. 1929년 지두한이 신파연극인을 망라한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를 만들자 거기서 배우통솔과 작품제작을 맡는 등 실제적인 활동을 한다. 1935년 동양극장이 설립되고 전속단체가 조직되었을 때 변기종은 청춘좌(靑春座) 단장이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마음 놓고 배우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1945년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때 청춘좌의 <신사임당>(송영 작)으로 남자연기상을 수상했다. 해방이 되고 동양극장 전속단체들이 해산되자 그는 동양극장 시절 단원들을 모아 극단 자유극장을 조직하고 창단공연으로 진우촌 작 <망향>을 공연하였다. 1957년 국립극장이 대구에서 환도하자 극단 민극을 만드는 데 원로로 참여하고 이 극단이 국립극장 전속단체가 되면서 극립극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동양극장 계열의 민극으로 출발하여 신협과 합침으로써 신파계열과 정통신극계열이 통합되는 과정의 중앙에 그가 있었다. 1957년 초대 국립극장 단장이 되어 신협과의 갈등 속에서도 타계 전까지 국립극단에서 활동했다. 변기종은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항상 ‘배경인물’이었다. 연극을 하며 이익을 좇지도 않았으며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는 탁월함이 아닌 평범하지만 강하고 굳은 의지로 배우생활을 해온 배우의 좋은 본보기로 우리 연극사에 기억되고 있다.
생애 및 약력
1895년 서울 출생 1902년 명동성당부설학교에서 한학 수학 1912년 박창한이 이끄는 극단 청년파일단 가입 / 이기세의 유일단에 가담 1916년 이기세와 함께 예성좌 조직 1919년 신극좌 대표 1926년 신파극 인기배우들을 중심으로 조선극우회 조직 1929년 조선연극사(朝鮮演劇舍) 가입, 배우통솔 및 작품제작 1935년 동양극장 내 청춘좌 단장 / <신라의 달>(박영호 작) 공연 중 독립운동을 다룬 내용이라 하여 일경에 구속 1945년 자유극장 조직 1950년 조선연극동맹 위원장 1951년 상록극회 창립 1953년 극단 자유극회 조직(장훈, 최무룡, 조미령 등) 195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57년 극단 민극 조직에 원로로 참가 / 초대 국립극단 단장 1977년 타계
상훈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 197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작품활동
1912년 청년파 일단의 <청년입지고아소위> 출연 1935년 <신라의 달>(박영호 작) 출연 1945년 <신사임당>(송영 작) 조선연극문화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참가작 / 남자연기상 수상 / <망향>(진우촌 작) 1951년 상록극회 창립공연 <명우 추해당> 공연 1953년 극단 자유극회 창립공연 <나는 자유를 선택하였다>로 남쪽지역 순회공연 1957년 <신앙과 고향>(카알 쉔헤르 작, 서항석 역, 홍해성 연출, 시공관) 출연 / <발착점에 선 사람들>(이무영 작, 이광래 연출, 시공관) 출연 1958년 <우물>(김홍곤 원작, 이진순 연출, 시공관) 출연 / <가족>(이용찬 원작, 이원경 연출, 시공관) 출연 / <시라노 드 벨쥬락>(에드몽 로스탕 작, 손우성 역, 이진순 연출, 시공관) 출연 / <인생일식>(강문수 작, 박진 연출, 시공관) 출연 1959년 <젊은 세대의 백서>(하유상 작, 박진 연출, 시공관) 출연 / <대수양>(김동인 원작, 이광래 각색, 박진 연출, 시공관) 출연 1960년 <빌헬름 텔>(오영진 작, 이해랑 연출, 시공관) 출연 / <분노의 계절>(이종기 작, 이진순 연출, 시공관) 출연 1961년 <마을의 봉팔이>(이석청 작, 박진 연출, 시공관) 출연 / <여당원>(철오 원작, 서항석 각색, 이진순 연출, 시공관) 출연 1962년 <침종>(하우프트만 원작, 서항석 역·연출) 출연 1963년 <푸른 명맥>(이용찬 원작, 박진 연출) 출연 / <결혼중매>(손톤 와일더 원작, 오화섭 역, 이기하 연출) 출연 1964년 <베니스의 상인>(셰익스피어 원작, 김재남 역, 이진순 연출) 출연 / <만선>(천승세 작, 최현민 연출) 출연 1965년 <여성만세>(하유상 역, 오사량 연출) 출연 / <울어도 부끄럽지 않다>(제임스 리 원작, 한상철 역, 오사량 연출) 출연 1966년 <이순신>(신명순 작, 이진순 연출) 출연 / <이민선>(김자림 작, 전세권 연출) 출연 / <그 길고 지루한 여름>(김병원 작, 박진 연출) 출연 1967년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윤조병 작, 서항석 연출) 출연 1968년 <환절기>(오태석 작, 임영웅 연출) 출연 1969년 <여왕과 기승>(오태석 작, 이진순 연출) 출연 1975년 <광야> 출연
대표작품
<신라의 달> <소금> <만선>
리뷰
(……) 배우로서의 변기종은 처음부터 별 특색이 없었다. 우선 체격조건이 남의 눈을 끌만하지 못했다. 오척 단구의 왜소한 체구에다가 온후한 인상은 개성이 강해야 할 주연급 배우로서는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노역을 주로 맡았기 때문에 무대 위에서는 언제나 애늙은이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집중력이 강한 데다가 대단한 노력가였기 때문에 무슨 역이든 맡기만 하면 뛰어난 창조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좋은 역보다는 젊은 배우들이 꺼리는 섭탈 역(천민노인 역)을 즐겨 맡았고, 또 그런 역에서 대단한 장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에 항상 그런 역만 맡아하다 보니 연기에 변화가 없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장기 중의 또 한 가지는 분장술이었다. 그는 분장을 거의 스스로 했으며 분장술은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자기분장은 언제나 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기를 원했고 또 자기 스스로 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평범한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극사의 큰 뿌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평생 한눈 팔지 않고 홀대 받는 배우의 길을 걸어온 데다가 여러 가지 특색을 나름대로 지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연극계의 장로(長老)로서 후배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매한 인품 때문이었다. 동료에 대한 신의를 평생 저버리지 않았으며 남을 비방하거나 적대하지 않았으며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시대 강제로 신사참배 가서도 천주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직업으로서의 연기생활과 신앙생활을 일치시킨 거의 유일한 연극인이었던 것이다. (……) - ‘변기종과 이해랑’, 유민영, <문화예술>, 1991년 12월
창작노트
(……) 그러니까 내가 처음 연극을 시작한 것은 내 나이 18살 때이니 1912년이 되는 셈이다. 내가 가입한 극단은 ‘유일단’으로 당시에는 가장 우수한 극단이었다. 단장은 이기세라는 분으로 그분은 동경대학을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 분은 동경 유학시절 일본 신파계에서 유명한 정간소차랑(靜間小次郞) 문하생으로 연극을 배웠다. (……) 나는 계성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중앙가톨릭교회의 추천으로 상급학교, 즉 대학이나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인지라 암매(暗昧)한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아울러 미신숭배 타파, 악습타파 등을 위한 계몽운동을 벌이고 싶어졌다. 마침 서울의 연흥사에서 임성구 일행이 이끄는 혁신단의 연극공연을 보고는 그러한 나의 생각을 연극을 통해 민중에게 전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것이 내가 연극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동기가 된 셈이다. 관객들은 무대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보고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기쁘면 박수를 쳐대고 무대 위의 배우가 흥분하면 같이 울분을 참지 못했다. 일제하인지라 드러내놓고 일본을 욕할 수는 없어서 표면으로는 일본에 충성하는 척했지만 내용으로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으니 관객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 지방순회공연의 천막극장이나 서울의 극장 무대는 일본식이었다. 일본 책을 보고 그대로 무대를 만들 줄만 알았지 한국식 무대는 통 만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승희 씨가 이끄는 토월회가 지금의 을지로4가 자리에 있었던 광무대극장에서 처음으로 순한국식 무대에서 공연했다. 그 후로는 각 극단에서 이를 본받게 되어 일본식 무대에서 조선 옷을 입고 조선말로 공연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의 연극들을 지금 생각하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연출자도 따로 없고 대본도 없었으므로 곧 연기자가 작가이자 연출자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배우란 창의력도 있어야 했고 정신력도 강해야 했다. 그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극 생활을 통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도 많았지만 끝내 연극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힘든 생활이었으나 고수해왔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긍지를 갖게 한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연극계가 경제적으로 흥청망청하거나 공연 활동이 여의한 것은 아니지만 젊은 사람들이 한번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용기와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 - ‘나의 데뷔 시절-끝내 연극을 버리지 않았다’, 변기종, <한국연극>, 1976년 창간호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2000
연계정보
-국경(김도산)
-마음의 고향
-환절기
-만선
-이끼낀 고향에 돌아오다
-구름은 흘러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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