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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金貞桓)

예술가명
김정환(金貞桓)
전공
무대미술
개요
문헌(文軒) 김정환은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선구자이며 교육자로도 활동했으며 영화, 오페라, 무용계 등의 무대미술 전반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1935년 휘문고보에 입학한 그는 재학 당시 다방설계와 극예술연구회의 창립공연인 고골리의 <검찰관>의 조명과 무대장치를 맡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미술학교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하였다. 졸업하는 해 그는 일본인 친구와 동경에서 미술전시회를 가졌으며,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939년 일본극장에 들어가 이론과 실제를 익히게 되었다. 1940년 귀국하여 조선연예주식회사 및 조선악극단 미술과장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무대는 무대 뒤의 영사막에 배경그림을 그리고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는데 그는 무대를 입체화시키며 본격적인 무대장치, 무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극단 고협에 입단하여 장치와 미술을 전담하였다.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고협뿐만 아니라 다른 극단의 공연과 당시 황금기를 이루던 악극에도 참여하였다. 1940년 일제에 의해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강제로 결성되면서 해방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다수 연극의 장치와 의상을 맡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서울특별시가 세워지면서 그는 서울무대장치소를 개설하고 소장직을 맡아 해방기의 연극, 악극 등 대다수 공연의 무대를 제작하였다. 서울무대장치소는 1950년 6·25 전까지 존재한 국내 최초의 유일한 무대제작소였다.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이 조직되자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신극협의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50년 중앙국립극장이 새롭게 설립되고 시공관을 그대로 국립극장으로 사용하면서 그는 초대무대과장을 역임하였으며 무대장치설비와 조명기를 확충하였다. 피난시절에도 대구 문화극장과 만경관, 부산의 부산극장을 오가며 무대 일을 하였다. 1954년 서울로 상경하고 종전이 된 이후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으면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리고 1960년 동국대학교에 연극학과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후학교육에 힘을 쏟았다. 1961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국내 최초의 반원형극장인 드라마센터가 세워질 때 설계에 참여하고, 1962년 개관기념공연 때부터 대다수 연극공연 무대미술을 담당해왔다. 이후 1969년 장충동 국립극장 설계에 참여했으며 1970년에는 후학을 위한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는 세계극장사>, <무대미술입문>, <한국극장발달사>). 1971년 후두암에 걸린 그는 수술까지 하는 고역을 치렀지만 회복 후에 무리한 작업과 계속 담배를 피운 것이 원인이 되어 1973년 9월 17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정환은 한국 최초의 무대제작소 설립, 1930년대의 무대 입체화 작업, 디자인과 장치의 분리, 회전무대와 중간막을 활용한 무대전환의 최초 시도 등의 업적이 있고, 고대의상과 장신구를 고증하여 자료화하였으며, 연극 400여 편, 창극 20여 편, 영화 30여 편, TV 드라마 150여 편 등의 무대미술을 담당하였다.
생애와 약력
1912년 서울 출생 1935년 휘문고보 입학 1937년 도일, 일본미술학교 응용미술학과 입학 1939년 동경에서 미술전시회 개최 / 일본극장에 들어가 이론과 실제를 익힘 1940년 귀국 / 조선연예주식회사 및 조선악극단 미술과장 / 이후 극단 고협에 입단, 미술과 장치를 전담 / 조선연극문화협회 결성 후 다수 연극의 장치와 의상 담당 1945년~1950년 서울무대디자인소 개설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근무 및 신극협의회에서 활동 1950년 국립극장 초대 무대과장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 / 신상옥 감독과 전창근 감독의 영화 세트제작 및 의상 소품에 참여 1956년 을지로 입구 원각사 소극장 설립고증에 참여 1960년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교수 / 파리 국제민속예술제 참가 1961년 드라마센터 설계 참여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기념 공연 <햄릿>에서부터 무대미술 담당 /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예일대학 연극학원에서 1년간 수학 1969년 장충동 국립극장 설계 참여 1970년 <눈으로 보는 세계극장사>, <무대미술입문>, <한국극장발달사> 발간 1973년 후두암으로 타계
상훈
동아연극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작품활동
1947년 <마의태자>(이화삼 연출, 국제극장) 극예술협회 1948년 <별>(허석 연출, 시공관) 극예술협회 1950년 <원술랑>(유치진 작·연출, 부민관) 미술 담당 / <뇌우>(조우 작, 김광주 역, 유치진 연출, 부민관) 1957년 <신앙과 고향>(카알 쇠인헤르 작, 서항석 역, 홍해성 연출, 시공관) 미술 담당 1959년 <젊은 세대의 백서>(하유상 작, 박진 연출, 시공관) 미술 담당 1960년 <여인천하>(박종화 원작, 차범석 각색, 이진순 연출, 시공관) 미술담당 / <빌헬름 텔>(오영진 작, 이해랑 연출) 1962년 <포기와 베스>(듀보스·웨이워드 작, 유치진 연출, 드라마센터) / <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 작, 이해랑 연출, 드라마센터) 1964년 <춘향전>(유치진 작·연출, 서울연극학교 창설기념공연) 1965년 <여성만세>(하유상 작, 이해랑 연출) 1967년 <세자매>(안톤 체홉 작, 백광남 역, 이해랑 연출) 미술 담당 1972년 <포로들>(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 미술 담당 / 그 외 연극 400여 편, 영화 30여 편, TV드라마 150여 편의 장치를 맡았음
대표작품
<원술랑> <춘향전> <별> <어둠의 힘> <뇌우> <마의태자> <자유부인> <포기와 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자명고>
저서
<눈으로 보는 세계극장사> <무대미술입문> <한국극장발달사>
리뷰
(……) 문헌(文軒) 김정환은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선구자이며 교육자로도 활동하였고 영화, 오페라, 무용계 등의 무대미술 전반에서도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고대의상이나 장신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 당시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 그는 ‘장가방’, ‘모리스 쉬발리에’, ‘노신사’ 등 그의 멋스러움을 그리는 많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루에 2번 이상은 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멋스러웠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멋진 모자를 썼다. 또한 어디를 가도 그의 양복색은 빛이 났으며 주위의 시선을 머물게 했을 정도로 그의 색에 대한 안목은 높았다. 또한 사람 좋고 친구가 많아 항상 그의 주위에는 연극인뿐만 아니라 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선한 인간미는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적이 하나도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멋진 양복을 입고 명동의 다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다소곳하게 이야기하던 김정환의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또한 그의 수많은 업적은 후학들에게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 ‘멋쟁이 신사 김정환’, 고설봉 구술, 김흥우 정리, <한국연극>, 2001년 1월 (……) 특히 김정환은 서울 명문가 후손으로 서울생활풍속에는 해박함과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달변가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세세함을 가졌으며 고증 자문을 청할 때면 흔쾌히 청산유수처럼 무척 재미있게 설명했다. 막힘 없는 해박한 지식에의 욕구는 서울, 국내에 머물지 않고 1930년 파리의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하기 훨씬 전부터 파리 뒷골목의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 구석구석을 마치 전에 한 번 갔던 것보다도 상세히 그려 설명해 보이곤 하였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감탄했던 분이었다. 후사가 없이 타계하여 선생의 수많은 자료의 훼손이 안타깝다. 선생 작품에 대한 수립과 정리 출판이 시급하다. - ‘원우전 선생에서 이병복 선생까지’, 양정현, <한국연극>, 1998년 6월
창작노트
(……) 이두현: 근대극 장치에 대한 관객의 그때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김정환: 아까 먼저 내가 이런 말씀을 했는데, 일반이 무대미술에 대해서는 반응이 전혀 없다고 말을 썼는데, 아직 내가 이런 소리하면 너무 외람된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인 관극태도가, 한국의 관극태도가 어떤가 하면 일반적으로 보면 아직도 극의 줄거리를 보지 배우 하나의 연기를 보고 그런 데까지는 안 갔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앙상블을 보고 그러는 것은 몇 사람 외엔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극을 하는 동인들끼리도 그걸 제대로 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관심이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게 대단히 섭섭한 노릇이고 통탄할 노릇입니다. 나는 이 내 지론을, 내 생각을 기탄없이 한 말씀이에요. 무대미술, 무대에 대해서 연극하는 동지들 자체가 그러니 일반대중들한테 무슨 반응을 바라겠습니까?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걸 보느냐면 연기를 그 사람이 잘 하는 사람이지만 무대장치하고 연기의 관계, 사소한 데를 봐도, 문은 연기하기 위해 만든 문이란 말씀이야. 정말 화난다고 문을 쾅 닫아가지고 배경이 전체 흔들리면 연기 잘 하는 사람은 무대를 망쳐 놓는 거밖에 더 되냔 말이에요. 또 하나는 요 몇 해 전 일이지만 일본 갔을 때, 아주 창피한 얘길 들은 일이 있어요. 무대에서 격투하는 장면이 있어요. 이 칼은 소위 액션이지, 이걸 정말 칼로 두들겨서 하는 약속들이 어디 있냐고. 정말 좋은 얘길 해줬다고 생각합니다. 연기의 힘으로 해야지 힘을 들여서 칼을 하루에 몇 자루씩 부러뜨리면 그걸 어디 좋은 연기라고 볼 수 있겠느냐, 지금도 한 30년 전에 들은 얘기지만 머리에 생생합니다. (……) - <대담신극사-1968년 김정환과의 인터뷰에서>, 이두현, 미간행, 1968
관련도서
<국립극단 50년사>, 김성희, 연극과인간, 2000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2000 ‘인물로 보는 한국무대미술사’, 양정현, <한국연극>, 1998년 6월 ‘잊을 수 없는 연극인 무대미술가 김정환’, 고설봉, <한국연극>, 2001년 1월
연계정보
-원술랑
-신극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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