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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국립극단

단체명
국립극단
장르
극단
개요

국립극단은 일반 극단이 시도하기 어려운 대작과 세계적 고전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뿐 만 아니라 창작극의 개발과 고정 레파토리 정립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찾아가는 국립극장’이라는 기치 아래 지방순회공연을, 지방자치단체인 동해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그곳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연극캠프’를, 중·고교 교사를 위한 ‘연극지도교사연수’ 등을 매년 실시하고 있다. 근래에는 예학 협동 프로그램인 ‘신작희곡페스티벌’을 연극원과 함께 개최하는 등 공연 이외의 행사들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다.

해설

정부는 국립극장을 설립함과 동시에 전속단체를 두기로 하고 1950년 1월에 신극협의회를 먼저 발족시켰다. 신극협의회(간사장 이광래)에서는 산하에 신협과 극협 두 단체를 두기로 했는데, 극협은 결국 조직되지 않았다. 신협의 창립멤버는 이해랑, 김동원, 박상익, 주선태, 오사량, 박제행, 박경수, 최삼, 전두영, 송재호 등 남자 10명과 김선영, 유계선, 황정순, 유해초 등 여배우들이었으며, 구성원의 성향을 보면 극예술연구회와 동경학생예술좌가 그 대부분이었으며 일부는 동양극장 계열이었다. 신협은 신극사의 정통 맥을 잇는 극단이었던 것이다. 신협은 국립극장 개관기념으로 유치진 작 <원술랑>을 허석 연출로 무대에 올려 1주일 동안에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두 번째 작품 <뇌우>(조우 작/유치진 연출) 역시 공전의 히트를 하고 3회 공연을 준비하던 중 6·25가 발발하게 되어 간신히 잡혀가던 연극 기반은 다시 무너지게 된다. 전쟁 중 신협은 별도의 사설 극단으로 활동하는 등 거의 기능 정지에 이르른 국립극단은 제2대 극장장으로 서항석이 임명되면서 별도의 전속단체는 두지 않기로 한다. 종전과 함께 국립극장은 5년여 만인 1957년 6월에 환도케 되고, 명동의 시공관에 둥지를 틀게 된다. 국립극장은 환도하면서 다시 전속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당시 경영난에 시달리던 신협을 흡수한다. 그러나 유치진과 서항석의 갈등 때문에 신협 단원들 전부가 국립극장을 떠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국립극장에는 신협(대표 이해랑)과 민극(대표 박진) 두 전속극단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당시 두 전속극단의 면면을 보면 신협은 이해랑 단장을 비롯해 김동원, 김진규, 박암, 이예춘, 주서선, 최남현, 고선애, 도금봉, 석금성, 최은희, 황정순 등이었고, 민극은 박진 단장에 김승호, 박노식, 서월영, 장동휘, 최무룡, 허장강, 노경희, 복혜숙, 이민자, 윤운자, 전옥, 주증녀, 조미령 등 전체 52명이었다. 당시 연극계, 영화계, 방송계의 스타급이 거의 망라된 것이었다. 전속 두 단체는 구성되자마자 합동공연으로 김동인의 역사소설 <대수양>(박진 연출)을 무대에 올려 국립극장의 침체기를 일탈하려 시도한다. 그러는 동안 4·19혁명과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권의 교체에 따라 국립극장도 변화를 겪게 된다. 1961년 11월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며 국립극장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옮겨감과 동시에 단원들의 법적 신분 보장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두 전속이었던 신협과 민극이 자동해체되고, 새로운 단일단체로서 1962년 1월에 국립극단이 정식으로 탄생케 되었다. 새 국립극단은 신협과 민극의 정식멤버가 주축이 되고 영화계와 소극장운동을 하던 연극인들이 가담했는데, 그 면면은 단장 박진, 부단장 이해랑, 단원 장훈, 고설봉, 장민호, 최성섭, 추석양, 최명수, 조항, 정애란, 백성희, 진랑, 나옥주, 한은진, 옥경희였다. 국립극단은 새로 탄생하면서 신진작가 이용차의 <젊음의 찬가>를 박진 연출로 공연하여 찬사를 받았는데, 연극계의 통합과 화합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우리 근대극의 두 줄기라 할 대중극(신파극) 계열과 정통극 계열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극장 계열을 대표하는 박진, 변기종 등과 학생예술좌와 극협계열을 대표하는 이해랑 등이 손을 잡은 것이다. 두 계열의 통합된 힘은 차범석의 역작 <산불>(이진순 연출)이 국립극장 무대에 화려하게 올려짐으로써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신인 발굴이라는 과제에 묶여 1960년대의 국립극장은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극작가가 부족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창작희곡을 모집해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시작해 하유상을 비롯해 천승세, 이재현, 김병원, 전진호, 윤조병, 오태석, 김용락, 정하연 등이 국립극단의 창작극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1960년대의 젊은이들 중심의 동인제 극단들이 국립극장 무대를 장식하는 바람에 국립극단은 상대적으로 진부하게 보이며 사설극단을 압도하지 못했다. 다만 안톤 체홉의 <세 자매>라든가 버나드 쇼의 <세인트 존>, 하우스만의 <침종> 등의 서구 근·현대 작품을 소개하는 뜻있는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사실 이 같은 국립극단의 행보는 1967년도에 밝힌 공연방침 “민속극의 확립 부흥을 위하여 국시에 적합한 창작희곡 상연에 치중한다”와 “외국의 고전소개와 신사조의 도입을 위하여 수시 번역극도 상연한다”는 조항을 충실히 지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창립이후 1969년까지 국립극단은 20년 동안 레퍼토리 56편 중 창작극이 39편이고 번역극이 17편으로서 창작극이 번역극의 배 이상이나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명동 국립극장은 현재의 장충동 신축 극장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장충동으로 옮겨간 초반에 국립극단의 모습은 창작극을 우선시하는 이전의 경향을 여전히 유지했다

. 다만 <성웅 이순신>을 비롯해 <남한산성>, <징비록>, <함성>, <손탁호텔>, <북향묘> 등의 역사극 취향을 보여준다. 1977년 이후 국립극단은 이전까지의 침체기를 벗어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동안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소극장 공연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 것이다. 1977년 4월의 제80회 공연인 <인생차압>(오영진 작)부터 <천사여 고향을 보라>(이해랑 연출), 오태석의 <물보라> 등은 그 동안의 침체를 단번에 벗어버릴 수작이었다. 특히 오태석이 국립극단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젊은 층 관객을 모으는 데 한몫한다. 이때부터 국립극단의 공연 횟수는 늘어나 대극장 공연 두 번, 소극장 공연 두 세 번 하는 식으로 증가했고 중앙과 지방의 문화격차 해소라는 차원에서 지방도시 순회공연도 자주 갖게 된다. 극작은 오태석을 비롯해 노경식, 김의경, 이강백, 김광림, 이만희 등과 최현묵, 오은희, 정우숙 등 신인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연출 역시 임영웅, 김정옥, 허규, 이승규, 정일성 등 중견들과 오태석, 김열, 김석만, 문호근, 윤호진, 이병훈, 강영걸, 김철리, 김창화, 이윤택, 김효경 등 신진들이 대부분 참여한다. 이후 국립극단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며 국제적 호흡 속에 단원들의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등 한결 젊어졌다. 특히 국립극장의 명작극장 시리즈와 우리 창작극 재발굴 등의 기획은 연극계를 자극시키는 좋은 프로그램들이었다. 국립극단은 서구 고전극과 근대극을 고르게 소개하는 한편, 훌륭한 창작극과 신진 극작가를 많이 발굴했으며,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보수정신을 바탕으로 정통극을 지켜왔다.

원술랑

신라 문무왕 때 소년 낭도 원술랑의 용맹으로 당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내용을 소재로 한 연극. 유치진의 희곡으로 소년 원술랑의 파란만장한 운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민족주체성과 통일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작품이다. 한국독립을 결의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4국회의의 협의를 깨고 어기고 한국땅에 38선을 긋고 군정을 편 미국과 소련의 신의를 삼국통일에 협조한 당나라가 나중에는 신의를 저버린 사실에 비겨 광복 직후의 정치상황을 신라의 삼국통일 교훈을 빌어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이념을 갖고 있다. 1950년 국립극장 개관작으로 선보인 <원술랑>은 그 때까지의 한국연극사상 최대의 호화 무대였으며 일주일 동안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인생차압

1949년에 발표된 인생차압은 오영진의 처녀희곡이자 장막극이다. 이 작품은 이중생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식민지의 잔재가 해방 후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매우 시니컬하게 묘사한 사회문제극이다. 일제시대에는 악질적으로 친일을 했고, 또 해방기에도 혼란을 틈타 거부가 된 친일 사업가 이중생은 사기, 배임횡령, 공문서 위조 및 탈세범으로 입건되지만 그의 법률고문의 기지로 재산몰수 방지의 거짓 자살극 흉계를 꾸미는 연기를 한다. 그러나 사위의 이름을 빼앗아 사위이름으로 해놓은 재산이 몰수 대신 어쩔 수 없이 사회사업에 쓰이게끔 넘어감으로써 사실 몰수당한거나 마찬가지로 사태가 진전된다. 그리하여 거짓자살 연극도 무의미해지고 진퇴유곡에 빠진 주인공 이중생이 결국 자살로 생을 끝내게 된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1949년 5월 우익진영의 중진들이 포진하고 있던 극예술협의회에서 당시로서는 신예 이진순의 연출로 중앙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중생 역은 6·25 전쟁 중에 납북된 이화삼이 맡았다. 그러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초연이 별다른 반응을 못 일으킨 뒤 1957년에 <인생차압>이라고 개명을 하여 무대에 올려지게 된다. 그 당시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의 전속단체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해랑이 연출하고 이중생 역에 장민호를 비롯하여 황정순, 백암, 박상익 등이 출연하여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걸작으로 주목받게 된다. 이러한 공연의 커다란 성공은 영화제작에까지 이어진다. <인생차압>은 1958년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다. 김승호, 황정순, 유계선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성공함으로써 작품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 이후 1977년 4월에 국립극단에서, 1993년에는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원제목 그대로 극단 연우무대에 의해 재공연되는 등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천사여 고향을 보라

국립극단 제85회 정기공연으로, 토마스 울프의 원작을 이해랑이 연출한 작품이다. 전 생애를 나라를 위해 바친 후 1943년 조국의 광복을 2년 앞두고 시베리아 차가운 눈 속에서 삶을 마감한 의병장 홍범도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그 당시의 국제열강의 힘의 역학이나 약소민족의 나라 없는 설움과 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립과 자유가 무수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그러한 독립과 자유를 위해 몸바쳐 싸운 홍범도 장군의 의병운동 내지 독립투쟁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그의 일생과 활약 그리고 자유·독립을 얻기 위한 노력 등 진정한 우리 민족 독립 운동사상 불멸의 영웅에 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보라

국립극단 제88회 정기공연으로, 오태석 작·연출의 작품이다. (……) 이 극은 두 개의 줄기를 갖는데, 하나는 각시를 둘러싼 여러 남자-일렬, 신기리, 용만, 신장사와의 관계이고, 또 하나는 배를 내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의식과 사건이다. 그런데 그 두 개의 줄기가 과연 하나의 목표를 향해 새끼줄 꼬여 가듯 긴밀하고 불가분의 관계에서 움직여갔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작가가 당집을 연극적으로 보다 효과있게 활용하지 못한 것도 그러한 전체적 통일성과 연관된 문제인데, 극이 다 끝나 모든 사람이 흩어져나가고 선주 혼자만이 빈 무대에서 당집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것은 어찌보면 돌연한 그리고 성급한 결말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러한 몇 가지 불안과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물보라> 공연은 칭찬을 받을 만한 공연이었고, 연기자들의 노력이 그만큼 컸음을 입증해 주었다. (……) -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비약적 도약 국립극단이 이룩한 공전의 업적’, 한상철, <공간>, 1978년 10월호

홍동지는 살어있다

국립극단 제154회 정기공연이자 1991 국립극장 우수창작극 공모 당선작이다. 김광림의 작품을 이윤택이 연출했다. 전통의 이미지를 현대적 시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무대를 삼분할했다. 즉 제도의 성곽은 광화문, 근대 수난사의 상징으로서의 중앙청, 민족의 신화와 인식·정서·호흡이 묻혀 있는 북악산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배우들의 연기는 상징극적 성격을 지니므로 운문적인 리듬을 타는 걸음걸이, 도약, 비상, 회전 등의 우리식 워킹 메소드가 기본을 이뤘다. 즉 가면극, 인형극, 굿, 축제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각 배역의 이미지로 차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극적 연기양식을 시도했다.

박진 (1905~1974)

서울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일본대학 예술과 중퇴 이후 연극에 투신, 토월회에 가입했으며 간부로서 연출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어 1928년 산유화회, 화조회를 조직했으며, 동양극장에서 안종화, 홍해성 등과 더불어 연출가로서 활동했다. 광복 후 문교부 주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 <혈맥>(1946)을 연출하여 연출상을 수상하였다. 1959년 국립극단 단장, 1960년 예술원 회원, 196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73년 국립극장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연출작품으론 <향토심>(1927), <화란을 당한 자>(1928), <꽃피는 나무>(1943) 등 수백 편에 달한다. 극작가로서는 장막극 <소낙비>(1927)가 데뷔작으로 <명기 황진이>(1936), <공작선생>(1951) 등이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검사와 사형수>, <혈맥>, <야화>,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이해랑 (1916~1989)

서울 출생. 1934년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하고, 1946년 극단 신협을 창립하였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미국 국무성 초청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계를 시찰하고 왔다. 1959년부터 1982년까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62년 드라마센터 극장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1964년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하였다. 1965년 이해랑 이동극장을 창립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1967년부터 1973년까지 예총 회장을 맡았다. 제8대, 제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정활동을 펼쳤으며,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였다. 1984년 호암아트홀의 <햄릿>공연 연습 중 과로로 쓰러져 서울 남현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일생동안 200여 편의 연극을 연출하였으며, 국민훈장모란장,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91년 12월 문화부 선정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 대표작품 <인생차압> <밤으로의 긴 여로> <학 외다리로 서다> <햄릿>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여성만세> <목격자> <광야>

리뷰

(……) 1950년 새봄 중앙국립극장이 화려한 개관식을 가진 다음 개관 첫 공연작품으로 유치진의 창작희곡 <원술랑>을 선뵈었을 때 연극계는 문자 그대로 축제분위기였다. 동양에서는 최초로 국립극장이 들어섰다는 자긍도 그러했거니와 흩어진 중견 연극인들이 한데 뭉치어 신협과 극협의 두개 전속단체를 이루었고, 나아가서는 국립극장의 장래를 위하여 젊은 연극학도까지 연구생으로 끌어들여 준단원제도까지 두었었다. 나는 그때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그 준단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첫 작품 <원술랑>이 역사적인 의미와 상부한 성공작으로 평가되자 국립극장 측은 그 두 번째 작품으로 조우 작 <뇌우>를 선정해 곧바로 연습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어떤 경우로 하필이면 우리에겐 생소했던 중국작품이 채택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추측컨대 소설가이면서 중국사정에 밝았던 김광주와 신협단원과의 친분에서 소개되었을 공산이 크다. 나는 학교가 끝나는 대로 국립극장 연습실 한 구석에서 선배연극인들의 열띤 연습장면을 훔쳐보듯 하는 게 하나의 기쁨이었다. (……) <뇌우>의 연습은 불꽃 튀는 듯 했다. 우선 연기진만 하더라도 남자로는 이해랑, 김동원, 박경주, 오사량, 박상익, 신태민, 여자로는 김선영, 유계선, 백성희, 황정순 등으로 중진배우와 신진들이 고루 어우러진 황금배역이었다. 특히 유계선과 백성희는 약 10년 터울이었는데도 더블 캐스트였고, 황정순은 소녀역 사봉으로 스타덤에 오를 찬스를 포착했으니 그 뜨거운 입김과 몸부림은 연습장 안을 훈훈하게 익히곤 했었다. 장안엔 <뇌우> 선전포스터가 나 붙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초연이 아니었다. 이미 낙랑극회에서 상연한 바 있었고, 그때 출연했던 황철, 문정복, 유경애 등은 월북한 후였으니 <뇌우>에 대한 연극애호가나 연극인들의 관심은 저절로 예민해졌을지도 모른다. (……) - ‘내가 본 뇌우’, 차범석, 국립극단 제134회 정기공연 <뇌우> 팜플렛 중

관련도서

<국립극단 50년사>, 국립극장, 연극과 인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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