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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성좌

단체명
취성좌
장르
극단
개요
혁신단의 배우였던 김소랑이 신파 배우 수십 명과 조직한 극단. 취성좌는 배우층이 두터워 신파극의 인기가 하락했을 때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훗날 악극으로 발전되는 막간극을 신파극단으로서는 처음 시작했다. 1920년대의 대표적 대중 극단이었으며, 취성좌의 역사는 1930년대의 조선연극사로 이어진다.
해설
취성좌는 1918년 2월 하순에 김소랑을 좌장으로 하여 좌장의 아내로서 나인출신 마호정을 재정담당 책임자와 주연 여배우로 내세우고, 젊은 배우들인 김규영, 최여환, 성광현, 이행산, 최무경, 백완종, 이응수, 홍정현 등이 모여 창단했다. 창립공연으로는 신소설 각색극인 <추월색>을 올렸다. 막강한 배우진 때문에 취성좌는 신파극 쇠퇴기에도 비교적 역동적으로 극단 활동을 해 나갔다. 지방순회를 다녀온 뒤 공연한 <야성>이란 작품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은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요사이 우미관에서 흥행하는 취성좌 일행의 <야성>이라 하는 연극을 보았다. 그 극을 볼 때 우리 조선사회도 얼마나 많이 열린 것을 비로소 판단하게 되었다. 그 <야성>이란 각본은 관객에게 권선징악의 인상만 줄 뿐이었으니 상장한 역자, 즉 배우들이 매우 숙달된 것 같았으며, 전자의 다른 단에게 듣던 바 구절이 닿지 않는 말, 즉 말 되지 아니하는 말, 다시 말하자면 무식한 말은 들어볼 수가 없었다. - ‘김소랑의 야성을 보고’, 유지영, <매일신보>, 1919년 12월 25일 그러나 취성좌가 연기 면에서 발전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일본식 신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혁신단 시절 어깨너머로 일본신파를 배운 김소랑은 일본투 신파극을 그대로 고집했다. 청소년 시절 취성좌 연극을 본 바 있는 박진도 그들의 탈피하지 못한 일본색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런데, 취성좌도 신극좌와 막상막하의 대중의 찬서을 받으면서 그들에게도 결점은 많았다. 신파 연극에 없어서는 안 되는 다찌마와리는 여기도 없을 수 없으나 툭하면 빼드는 단도, 장검은 조선인의 현생활과 동떨어지는 비합리성을 지식인 사이에서 비평하기도 했다는 것은 상술한 신극좌 부분에서도 언급하였으나 이 두 사람, 즉 김도산과 김소랑은 초창기의 신파보다는 월등하게 발전시켰는데도, 무대장치나 기타 모든 점에 미흡한 것이 많았고, 아직도 일본신파의 탈을 벗지 못하여 소위 다찌마와리라는 격투장면의 그 방법은 일본의 특산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의복과 용기에서 그대로 흉내냈던 것이어서 눈설게 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 <한국연극사1>, 박진, 예술원 취성좌의 일본색은 서양 영화 때문에 멀어지기 시작한 대중의 발길을 연극에 되돌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취성좌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전국 방방곡곡, 심지어 만주 북간도까지 찾아갈 정도로 공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김소랑은 신파극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꺽지 않고, 재정적 뒷받침을 충실히 해준 내조자이며 여배우였던 마호정의 뒷받침으로 취성좌를 이어나갔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음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그 이전부터 간간이 촌극도 하고, 노래와 춤을 삽입하던 취성좌는 가요부를 두어 이종철, 이애리수 등을 끌어들여 본격적인 촌극과 노래를 보여주었다. 취성좌 외 기타 신파극단에서도 유행한 정극 막간 사이의 쇼는 후에 악극이란 독자적 장르로 발전해 나갔다. 하지만 취성좌가 내놓은 막간이라는 방책도 기울어가는 가세를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최성좌의 대표레퍼토리라 할 <불여귀>, <매몰된 연애>, <극락조>, <유랑의 남녀>, <북극의 사랑>, <온천장 일야>, <짠발짠>, <카츄사>, <국경>, <영겁의 처> 등과 같이 번안물이 주가 되어 있는 진부한 작품들로서는 서양 영화에 빠진 대중을 끌어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취성좌는 창단 12년 만인 1929년 12월 중순 해산하게 된다.
진중설
(……) 얼마동안 원산과 인천 등 지방으로 순업 중이던 취성좌 일행은 며칠 전에 상경하여 지난 오일부터 황금정 광무대에서 흥해한다 함은 임의 보도한 바 있거니와 처음 날은 <진중설>이라는 예제를 가지고 흥행하였던 바 개장함을 따라 일동의 관객들은 물밀듯이 순식간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었고 역자들은 전일보다 더욱 숙달한 것을 보겠다더라. (……) - <매일신보>, 1920년 1월 27일
리뷰
취성좌의 레퍼토리는 과거지향적이었지만, 무대형상화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우리식대로 바꾸려 노력했다. (……) 신파극의 다른 변화는 무대 형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취성좌의 지도부는 <도야지 짐승이 목에 칼을 받을 때의 부르짖음>(<동아일보>, 1929년 10월)과 같은 그러한 연기로서는 벌써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좀 자연스럽고 또 조선사람의 생활과 부합되는 그러한 대사와 동작을 고안해내려 하였으며 특히 조선에는 없는 안마쟁이라든가 일본군인들이 뛰어나오는 식의 활극을 그만두었었다. 그리고 무대장치도 조선의 산천에 가깝게 꾸미기 시작하고 효과에도 많은 고려를 돌리게 되었다. (……) - <조선연극사개요>, 한효, 국립출판사
관련도서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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