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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협의회

단체명
신극협의회
장르
극단
개요
1950년대 신극을 주도하고 발전시킨 대표극단. 해방 후 연극계는 좌익이 주도했었는데, 이때 우익 집단으로서 등장한 것이 신극협의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극예술협회였다. 신극협의회(약칭 신협)는 1950년대의 기성극계를 대표하는 극단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해설
1949년 대통령령에 의해 국립극장(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구 부민관)이 설립되고, 극장장에 유치진이 결정됐다. 유치진은 국립극장 전속 극단으로서 신협과 극협을 두었는데, 극협은 이름만 둔 채 발족시키지는 못했다. 신협의 단원은 극예술협회의 단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신극협의회 간사장은 극작가 이광래였으며, 연기자로는 이해랑, 김동원, 박상익, 최삼, 전두영, 송재로, 이화삼 등 남자배우 11명과 김선영, 유계선, 황정순, 유해초, 백성희 등 여배우 5명이 최초의 멤버였다. 신협은 해방 직후의, 일제에 의해 압박당했던 민족정신을 되살리자는 당시의 상황에 걸맞게 민족적 역사극 <원술랑>(유치진 작, 허석 연출)을 창단공연으로 갖는다. <원술랑>은 4월 30일부터 일주일 동안 공연했는데, 5만 명 이상의 관객 동원에 성공한다. 곧 이어 제2회 공연으로는 번역극인 중국의 현대 극작가 조우의 <뇌우>(유치진 연출)를 올려 역시 관객의 많은 호응을 받는다. 극협시절부터 주인공을 도맡아했던 김동원을 제치고 이해랑을 내세운 <뇌우>는 열흘 공연한 데 이어 관객의 요청으로 5일간 앵콜 공연까지 하며 7만 5천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당시 40여 만 명의 서울인구 중 6분의 1 정도가 구경한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순조롭게 출발한 신협은 6·25 사변이 터지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신협 단원들은 군대와 함께 1·4 후퇴 피난길에 나서 대구에 짐을 풀고,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전쟁 중 연극을 상연하게 된다. 처음에는 신작을 내놓을 형편이 되지 못했던 만큼 과거에 인기를 얻었던 레퍼토리를 재상연했는데, 차츰 성공을 거두며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의 번역극을 신작으로 내놓는다. 당시 신협의 레퍼토리는 <자명고>, <마의태자>, <원술랑>, <별>(이상 유치진 작)의 창작극과 앤더슨의 <목격자>, 사르트르의 <붉은 장갑>, 조우의 <뇌우>,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오델로>, <멕베드>, 몰리에르의 <수전노> 등이었다. 신협의 공연은 극장에 발 디딜 자리도 없을 만큼 만원사례를 기록하며 갈 곳 없던 피난민들에게 큰 위안처가 되어 주었다. 대구 피난 시절 신협에서 활동한 단원들은 이해랑, 김동원, 이진순, 윤방일, 박경주, 주선태 등의 중견들과 오사량, 최무룡, 장민호, 심재훈, 김규대, 박상호, 장일호, 조항, 김한극, 박암, 민구 등의 신인들 그리고 황정순, 이희숙, 강효실, 나옥주, 강유정 등의 여배우가 있었다. 신협은 타 도시의 초청을 받을 정도로 전쟁 중 유일한 극단으로서 인기가 대단했다. 신협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유치진 각색, 이해랑 연출로 무대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김동원이 햄릿, 김복자가 오필리어, 황정순이 왕비 역을 맡았다. 또 다른 신협의 셰익스피어 성공작으로는 김동원이 오델로를 맡고, 이야고는 이해랑, 최은희가 데스데모나를 연기한 <오델로>(유치진 연출)가 있다. 몰리에르의 <수전노>(이광래 연출, 이해랑 주연)도 당시 인기를 얻었던 희극 공연이었다. 실러의 <빌헬름 텔>도 이해랑의 능숙한 연출 솜씨에 힘입어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전쟁이 끝나가며 서울 수복이 이뤄지자 신협도 거처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다. 하지만 전쟁 중 서항석이 국립극장장을 맡게 되었다. 유치진이 실질적으로 이끌어왔던 신협은 독자적 길을 모색하며 국립극단과 불편한 관계로 흐르게 된다. 게다가 주요 배우들 대부분이 영화계로 빠져나가고, 관객층 역시 영화로 빼앗겨 신협의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자유부인>(정비석 원작, 한노단 각색) 등의 대중 상업극을 올리기도 하며 힘겨운 재정난을 겪는다. 이 시기 이해랑은 미국의 초청을 받아 3개월간 시찰을 하고 돌아온 후 테네시 윌리암즈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아더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 <밤으로의 긴 여로>, 헤이워드의 <포기와 베스> 등의 미국 작품들을 신협에서 올린다. 이때 유치진이 세계연극 시찰여행에 오르게 되고, 국립극단이 신협에 손을 내밀어 신협의 단원들은 잠시 국립극단에 흡수되기도 한다. 하지만 유치진이 국내에 돌아오자 신협의 단원들은 국립극단의 제7회 공연 <야화>를 전후해 탈퇴하고, 회장에 유치진, 운영위원장 이해랑, 운영위원 김동현, 최남현, 강계식 등으로 민간극단 신협을 재출발시킨다. 새로 출발한 신협은 1958년 9월 신협 재건공연(제51회)으로, <한강은 흐른다>(유치진 작, 이해랑 연출)를 올린다. 이후 신협을 국립극단의 전속단체로 끌어들이려는 제의를 받아들여 신협은 1961년까지 국립극장 전속단체로서 혹은 단독으로 공연하며 맥을 이어간다. 신협은 1950년대 신극을 주도하고 발전시킨 대표극단이었다.
원술랑
신라 문무왕 때 소년 낭도 원술랑의 용맹으로 당의 침입을 격퇴했다는 내용을 소재로 한 연극. 유치진의 희곡으로 소년 원술랑의 파란만장한 운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민족주체성과 통일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 작품이다. 한국독립을 결의한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4국 회의를 어기고 한국땅에 38선을 긋고 군정을 편 미국과 소련의 신의를 삼국통일에 협조한 당나라가 나중에는 신의를 저버린 사실에 비겨 광복 직후의 정치상황을 신라의 삼국통일 교훈을 빌어 해결하고자 하는 정치이념을 갖고 있다. 1950년 국립극장 개관작으로 선보인 <원술랑>은 그 때까지의 한국 연극사상 최대의 호화 무대였으며 일주일동안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역사적인 공연이 되었다. - <한국예술사전 4권(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 16년에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이룩했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계속 신라에 주둔하여 곳곳에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앞세워 반란을 일삼는다. 노장 김유신의 둘째 아들 원술은 낭도들을 규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려고 전쟁터에 나선다. 백수성 싸움의 승전 소식 후에 석문벌 싸움의 패배와 원술의 전사 소식으로 장군과 지소부인이 슬퍼하며 마음을 다지고, 원술을 사모하는 진달래는 비탄에 잠긴다. 그런데 원술이 살아 돌아오자 장군은 분노한다. 세속오계를 어기게 된 원술은 왕으로부터 지경 밖으로 쫓겨난다. 아버지인 김유신의 마지막 운명조차도 볼 수 없는 죄인 원술은 지리산 속에 묻혀 죽기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를 사모하는 진달래의 권유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화랑들의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무명의 용사로 전장에 참여한다. 이 싸움에서 원술은 당나라 장수 고간의 목을 베고 신라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문무왕은 원술에게 포상을 내리려 했으나 원술은 계율을 어긴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후세에 전해 달라는 말만을 남기고 떠난다.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1958년 현대문학상을 받은 작품으로 6·25전쟁이 휩쓸고 간 우리 사회를 반영시켜 도덕의 타락, 기존 가치관의 붕괴, 인간 존엄성의 상실 등을 고발한 1950년대 수작으로 꼽힌다. 등장 인물의 대사에서 직접 시사한 것 뿐 아니라, 여러 극적 요소와 성향에서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관련이 깊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대는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서울역 부근의 무허가 판자촌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무대의 중심은 주위의 판자촌과 대비되는 고풍스런 기와집인데 이 집도 반쯤 파괴된 상태이다. 마흔살이 넘은 윤시중과 젊은 후취인 김영애가 이 집의 주인이고 여기에 퇴직 군수 송선생, 낙선 민의원 이선생, 실명 상이군인 박형래, 철도국원 한창선 등이 하숙을 들어 있다. 김영애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명문의 후손으로 시집왔으나 남편인 윤시중이 성불구자여서 항상 불만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그 불만은 하숙하고 있는 젊은 기관사 한창선에 대한 애정으로 기울게 된다. 한편 김영애의 이복동생인 김영자는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데리고 보육원에서 보모 노릇을 하며 살아가다 휴전이 되던 해, 언니의 집을 10년 만에 찾아온다. 김영자는 처음 만난 한창선을 사랑하게 되고, 그 즈음 윤시중은 귀중한 가보를 사기 당하고, 김영애는 그 일로 입원하게 된다. 얼마 후 김영애는 퇴원하였으나 김영자는 한창선을 잊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고, 하숙집 식객인 박형래는 김영자를 자기 아내로 오인한 사실에 절망하여 자살을 한다. 빚에 쪼들린 윤시중은 술집 춘향관 주인이 김영자를 찾는다는 현상수배 광고를 보고 매춘부로 착각하고, 있는 곳을 알려주어 돈을 타먹으려 하였으나 망신만 당한다. 한창선도 김영애와의 관계가 민망해서 하숙을 나간다. 텅빈 집에서 김영애는 기관차 소리를 들으며 고독을 달랜다.
나도 인간이 되련다
유치진의 작품으로 1953년 12월 공연됐다. 전후에 선호되던 반공극의 표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시대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예술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방법과 관점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
한강은 흐른다
1958년 9월 공연된 유치진의 작품. (……) 본격적으로 사실주의의 수정과 절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복합적인 무대 장치를 고정시킨 채 조명과 음악을 활용해 막간 없이 스물 두 장면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부분 조명과 전체 조명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장면을 바꾸며, 노래와 춤, 음악적 효과음을 이용해 전쟁 이미지에 대립되는 음악극적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작가는 이 방법을 ‘종래의 구심적 삼일치식 고전극 형태작법에서 벗어나 원심적 수법’을 써 보기 위한 첫 시도’라 하였다. (……) - 서연호 · 이상우, <우리연극 100년>
유치진 (1905~1974)
경남 통영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연극평론가이다. 호는 동랑(東朗).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도일,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서항석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주도한다. 1931년 희곡 <토막>을 ‘문예월간’지에 발표하고, 계속해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 장막희곡 <소>(1935)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사회성을 배제한 낭만적인 작품들인 <자매>(1936), <마의태자>(1937), <부부>(1940) 등을 발표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연극운동을 벌여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1941), 친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한 <북진대>(1942) 등의 희곡을 쓰고 공연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자명고>(1947), <원술랑>(1950)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 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등의 역작을 발표하였다. 이후 극작과 연출, 평론 활동을 계속한다. 초대 국립극장장, 반공통일연맹 이사,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65년에는 드라마센터를 창립하여 사실극 성립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1955), 문화훈장 대통령장 서훈(1962), 문화공보부 3·1연극상(1967), 문공부장관 공로장(1970) 등을 수상하였다. · 대표작품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소> <원술랑> <마의태자> <나도 인간이 되련다> <춘향전> <왜 싸워> <한강은 흐른다> <촌선생> <도념>
허석 (1906~1956)
경남 통영 출생의 연출가, 본명은 허남실. 동경학생예술좌의 회원 중 제일 연장자로 1935년에서 1936년까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연기 감독을 지냈다. 1938년 귀국 후 극연좌 단원, 극협 단원, 국립극장 단원, 신협 단원으로 활동했다. 동경학생예술좌의 <벌판>(1937)은 첫번째 연출 작품이다. 대표작품으로는 <산비둘기>(1949), <원술랑>(1950), <대춘향전>(1954) 등이 있다.
이화삼 (1933~ ?)
전남 목포 출생의 배우이자 연출가. 일찍이 도일하여 와세다 실업중학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2부대 문과를 중퇴하였다. 1929년 조선어극단에 입단하면서 극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조선연극협회(1936), 낭만좌(1938), 극단 전선(1945), 극예술원(1946), 극협(1947), 극단 신예술무대(1949) 등의 창립 멤버로 활약하였다. 주요 연극 출연작품은 <자명고>, <마의태자>, <조국>, <대춘향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이며, 영화 출연작품으로는 이규환 감독의 <창공>(1940), <똘똘이의 모험>(1946), 안종화 감독의 <수우> 등이 있다. 주요 연출작으로는 <마의태자>, <왕소군>, <자명고>, <원술랑> 등이 있다. 그는 6·25 직후 납북되었다가 탈출하여 은거 중 다시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후 생사불명이다.
리뷰
(……) 오랜 산고 끝에 탄생하는 국립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의 레퍼토리 선정은 쉽게 결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문화계의 4대 슬로건인 ‘(1)일제가 왜곡하고 날조한 우리 역사를 무대를 통하여서나마 올바르게 인식하자, (2)애국자들의 참 모습을 형상화하여 그들의 위대한 희생을 추모, 민족정기를 앙양하자, (3)하마터면 말살당할 뻔하였던 우리의 아름답고 바른말을 되찾아 배우자, (4)파괴된 생활, 인정, 풍속을 되찾아 한국적인 모랄을 세우자’는 등의 원칙들이 반영될 수 있는 작품이 요청되었다. 민족사의 재인식, 애국자상의 형상화, 민족 언어의 회복, 한국적 모럴의 수립 등의 과제를 한 작품 속에 끌어넣으려다 보니 자연 쇼비니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쇼비니즘의 극화로써 한 전형을 보여준 것이 <원술랑>이었다. (……) - 유치진, <동랑유치진전집9> (……) 정말 <원술랑>은 모두가 열연한 작품이었다. 효과 담당이었던 심재훈은 전투신에서 마그네슘 폭파가 잘못돼 중화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전 단원의 이런 열성이 작품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공연기간 일주일 동안 5만 명 이상의 관객이 들었는데 이는 신극사상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연극구경에 비교적 인색했던 상류층 관객을 대거 유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 - <국립극장 50년사>, 김동원 (……) 영화의 몽타주 수법같이 숱한 장면이 간결하게 확대되어 관객에게 제시되도록 꾸며져 있다. 전쟁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 주려고 여러 성향의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이들과 주인공의 행위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해 주제를 산만하게 하는 군더더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애인의 사이인 정철과 희숙의 관계가 사회 요인으로 불가피하게 비극 상황으로 빠져드는 과정 가운데서 두 인물 성격이 심화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행위와 삶이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 비극으로 발전하는 사실적인 단계를 면밀하게 추구하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희숙의 자살과 정철의 자아 비판도 진정한 비극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 -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관련도서
<한국현대극 연구>, 김미도, 연극과 인간, 2001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유치진 연구>, 이상우, 태학사, 1997 <동랑유치진전집>, 유치진, 서울예대출판부, 1993
연계정보
-원술랑
-도념(동승)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마의태자
-학 외다리로 서다
-나도 인간이 되련다
-한강은 흐른다
-김동원(金東園)
-국립극단
-이광래(李光來)
-유치진(柳致眞)
-김정환(金貞桓)
-백성희(白星姬)
-장민호(張民虎)
-이진순(李眞淳)
-이해랑(李海浪)
-빌헬름 텔(Wilhelm Tell)
-파우스트(Fa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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