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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金東園)

예술가명
김동원(金東園)
전공
연기
개요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 1951년 9월, 1·4후퇴를 맞아 대구로 내려간 극단 신협이 국내 초연으로 무대에 올렸던 <햄릿>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별명처럼 배우 김동원을 수식하는 말이다. 연극평론가 한상철은 “우리 시대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있듯이 우리 관객의 우상은 김동원 선생이었다. 우리 시대 관객이 꿈꾸고 열망하고 사랑하는 인간상을 김동원 선생은 생생하게 구현해주었던 것이다”라고 술회한다. 연극과 영화를 통틀어 5백여 편에 달하는 출연작도 이 사실을 입증해준다. 김동원의 본명은 동혁(東爀)으로, 그가 연극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배재고보에 입학하면서부터다. 평생의 친구 이해랑을 만났고, 학생 연극부를 조직하면서 극작가 유치진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이해랑, 유치진과의 만남이 그를 연극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들은 유진 오닐의 <고래>를 비롯하여 <바보치료>, <가보세> 등 세 편의 단막극을 창립공연으로 올렸는데, 김동원은 <고래>에서 선장 부인 역을 맡으며 배우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배재고보를 졸업하자마자 김동원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유일하게 연극을 공부할 수 있었던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진학한 니혼대학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본격적인 학문을 배우기에는 수준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김동원은 연극공부에 대한 갈증을 씻기 위해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동경학생예술좌’ 창립 동인이 되었다. 당시 이들은 연극사적으로도 기록될 만한 ‘사건’을 벌이는데, 바로 일본 신극의 산실 축지소극장에서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를 창립공연으로 올린 일이다. 김동원은 <소>에서 둘째 아들 개똥이 역을 맡아 열연했다. 2회 공연으로는 <춘향전>이 올려졌는데, 이때부터는 이해랑도 단역을 맡으며 참가했다. 김동원은 주연 이몽룡 역을 맡아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1937년 대학 졸업 후 일본의 송죽영화사에 입사했지만 일본 영화사의 차별대우를 참지 못하고 귀국, 유치진 주도의 극연좌에 들어간다. <깨어서 노래 부르자>라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기성 연극계에 신고식을 했지만 동경에서 연극활동을 했던 것이 일경에서 좌익으로 몰려 연극활동을 중지당하고 말았다. 그의 연극 인생에서 몇 년 간의 휴지기가 찾아온 것이다. 시대적 격랑에 휩쓸려 잠시 연극을 그만두었지만 이 시기는 오히려 그에게 연극에 대한 갈증과 애정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다시 연극을 하기로 마음먹은 김동원은 주영섭이 연출을 맡았던 <흑룡강>의 주인공과 <춘향전>의 이몽룡의 대역 출연을 맡으며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이를 시작으로 학생예술좌 친구들과 극단 ‘전선’을 조직했으며, 1947년에는 친일파로 몰려 칩거 중이던 유치진을 독려해 극예술협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극단에서 김동원은 창립공연 <자명고>의 호동왕자 역에서 출발,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1950년, 국립극장이 설립되자 극협은 국립극장에 흡수된다. 즉 ‘신극협의회’라는 국립극장 실무기구 소속으로 편입되어, 신협이라는 새 간판 아래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1950년 4월 30일, 유치진 작 <원술랑>이 개관기념작으로 무대에 올랐으며, 김동원은 주인공 원술랑 역을 맡았다. 1951년 신협은 피난지 대구에서 국내 초연인 <햄릿>을 성공적으로 무대화하여 대중을 사로잡았다. 이때 김동원은 주인공 햄릿 역을 맡아 ‘한국의 올리비에’라는 칭호를 얻었다. 1950년대 중반, <자유부인> 출연을 시작으로 1970년 국립극단에 몸담기까지 약 300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도 그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김동원의 대표작은 <햄릿>의 햄릿 역,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역,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역이다. 1970년 5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 역은 김동원에게 악역의 매력을 가르쳐 준 또 하나의 좋은 배역이었다. 그의 은퇴 공연이었던 <이성계의 부동산>은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23회 공연을 마친 후 대전과 강릉에서도 4회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1년간 마지막 정열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는, 배우는 역시 은퇴할 시점을 잘 택해 자신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관객들에게 가슴 깊이 남기고 미련 없이 무대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이성계로 분장한 김동원의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김동원은 은퇴할 때까지 철저하게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1967년 극단 신협 대표, 1975년 국립극단 단장을 역임한 것이 전부다. ‘감투에 욕심 없는 순수한 연극인’이라는 헌사는 이런 점에서 그에게 진정 어울리는 말이다.
생애와 약력
1923년 개성 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1926년 서울 공옥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 1929년 공옥보통학교 졸업 /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34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입학 / 동경학생예술좌 창립동인 1935년 동경학생예술좌 창립공연 <소>(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 <나루>(주영섭 작, 연출) 출연 1936년 동경학생예술좌 <춘향전>(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 출연, 이해랑 만남 1937년 일본 쇼우지구(松竹) 영화사 입사 / 니혼대학 예술과 졸업 1938년 귀국하여 극단 극연좌에 입단 1939년 학생예술좌 사건(유치진을 비롯하여 주영섭, 박동근, 마완영, 이해랑과 함께 좌익계로 몰려 종로경찰서에 구속 1940년 경성방직 산하 삼양상사에 입사 1945년 극단 전선(全線) 창립 동인 / 이 공연을 계기로 예명 ‘동원(東園)’ 사용 1947년 극단 극예술협회 창립 동인 1950년 극단 신협 창립동인: 이해랑, 박상익, 이화삼, 김선영, 백성희, 황정순 등과 함께 국립극장 전속극단인 신협의 핵심 멤버가 됨 / 신협 <뇌우>(조우 작, 유치진 연출) 출연, 당시로서는 엄청난 관객 동원(75,000명) / 박제행, 김승호, 최은희, 양백명, 이화삼 등과 함께 인민군에 피랍 / 납북길에 평남 순천에서 미군기 폭격 틈을 타 극적 탈출 1968년 극단 신협 대표 취임 1970년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 취임 1974년 국립극단 입단 1975년 국립극단 단장 1982년 이해랑, 이원경과 함께 한국판 배우예술원(Actor's Studio) 설립 1985년 국립극단 지도위원 위촉 1992년 희수기념 자서전 <예(藝)에 살다> 출판 2003년 미수 기념 회고록 <미수의 커튼콜> 출판 2006년 타계
상훈
1953년 제4회 문교부 주최 전국연극경연대회 연기상 수상. 신협 <은장도>(윤방일 작, 허석 연출) 1956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선 1963년 서울시 문화위원 위촉 1967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66년 한국일보 주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수상. 극단 창조 <파우스트>(서항석 연출)의 메피스토펠레스 역 1966년~1967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연기상 수상 1972년 대한민국국민포장 수훈 197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심사위원 1977년~1979년 3·1문화상 심사위원 1981년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추진위원 1982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년~1991년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87년 제11회 동랑연극상 수상 1989년~1992년 3·1문화상 심사위원 1989년~1991년 노동문화제 연극부문 심사위원 1990년 이해랑연극재단 이사 /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수훈 / 5·16민족상 수상 1991년 제5회 예총예술문화 공로상 수상 1994년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수상 1995년 3·1문화상 수상
작품활동
1935년 동경학생예술좌 창립공연 <소>(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 <나루>(주영섭 작, 연출) 출연 1941년 현대극장 창립공연작 <흑룡강>(유치진 작, 주영섭 연출) 출연 1945년 창립공연작<검찰관>(고골리 작, 허집 연출) 출연 1946년 낙랑극회 <기미년 3월 1일>(함세덕 작), <산적>(함세덕 작), <뇌우>(조우 작, 이서향 연출) 출연 1947년 창립공연작 <자명고>(유치진 작, 연출) 출연 1947년~1950년 극예술협회 <마의태자>, <은하수>, <목격자>, <대춘향전>, <청춘>, <검둥이는 서러워>, <별>, <애국자>,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어둠의 힘>, <도라지공주> 등 출연 1948년 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 출연. 영화로는 첫 출연 작품 1950년 신협 <원술랑>(유치진 작, 허석·이화삼 공동연출) 출연. 국립극장 개관 기념공연으로 신극 사상 최초의 대대적 성공 1951년 대구 키네마극장을 무대로 신협 <자명고>, <마의태자>, <원술랑>, <맹진사댁 경사>, <목격자>, <별> 출연 / 신협 <햄릿>(이해랑 연출) 출연 / 신협 <맥베드>(이해랑 연출) 출연 1954년 신협 <인수지간>(오약 작, 김동원 연출) 출연. 연출로는 첫 작품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공연작 <햄릿>(이해랑 연출) 출연 1970년 신협 <파우스트>(괴테 작, 전세권 연출) 출연 1974년 국립극단 <남한산성>(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 출연.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수상 1977년 국립극단 <파우스트>(이해랑 연출) 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기념공연작 <햄릿>(이해랑 연출) 출연 1994년 은퇴무대 <이성계의 부동산>(이근삼 작, 김도훈 연출) 출연 그 외 연극 300여 편, 영화 400여 편 출연
대표작품
<소> <햄릿> <원술랑> <맹진사댁 경사> <파우스트> <이성계의 부동산>
저서
<미수의 커튼콜>, 김동원, 태학사, 2003
리뷰
원로 연극배우 김동원 씨의 은퇴 공연인 <이성계의 부동산>(이근삼 작, 김도훈 연출, 국립극단)의 서울 공연이 25일 끝났다.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3월 3일부터 23회 공연된 이 연극은 62년 동안 오로지 무대에서 산 김동원 씨를 기리기 위해 그를 존경하는 후배들이 마련하고 한국일보사가 후원한 기념무대였다. 주인공인 이성계 역을 맡았던 김동원 씨는 커튼콜을 할 때마다 시종 눈물을 흘렸으며 관객은 그의 마지막 열정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 공연은 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김대중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등 1만여 명이 관람했으며, 24일에는 이민섭 문체부장관이 그의 연극인생을 칭송하는 공로패를 무대에서 전달했다. 김동원 씨는 “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 명예스런 퇴장이 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객석에 앉아 후배들의 연극을 보면서 마지막까지 연극인으로 남겠다. 은퇴 공연을 성원해준 언론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 <한국일보>, 이현주, 1994년 3월 26일 김동원 회고록 <미수(米壽)의 커튼콜> 출판기념회와 아울러 ‘영원한 햄릿, 김동원의 예술과 삶’ 전시회가 최근 조선일보사 미술관에서 열렸다. 원로배우 김동원의 88세를 즈음하여 마련된 행사였다. 연극계와 영화계는 물론이고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한결같이 축하와 경의를 아끼지 않았다. 1933년부터 1994년 마지막 은퇴 공연까지 62년간 공연계를 이끌어온 거목 김동원. 그 긴 세월 동안 가장 모범적이고도 뛰어난 예술인으로 칭송 받는 그이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으리라. 행사장 분위기는 실로 감동적이었고 한마디로 축제였다. 필자가 특별히 감명을 받은 것은 전시회에 펼쳐진 수많은 공연 관련 자료들이었다. 김동원이 배재고보 시절 출연했던 <성자의 샘> 무대사진을 비롯하여 <햄릿>, <오셀로>, <파우스트>, <세일즈맨의 죽음> 등 기라성 같은 명작들을 사진으로나마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옛 포스터와 카탈로그 그리고 심지어 출연 당시 입었던 의상들까지도. 그 어렵고도 연속된 격변의 시대를 거쳐온 그가 어쩌면 그렇게도 관련 자료들을 철저하게 잘 보관해 왔을까. 다른 분야보다도 특별히 문화예술 분야의 자료는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때 더욱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한국연극 전체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소중한 기록이었다. - <조선일보>, 강효주, 2003년 12월 2일
창작노트
(……) 연극이 이런 예술적 감동을 주기 위해서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배우란 남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연기에 들어가면 원래의 자신을 철저히 잊고 그 맡은 역할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좋은 배우는 남의 삶을 자신의 삶처럼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기에 어떤 역할을 맡아도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는 변신의 귀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배우가 새롭게 변신해 다른 사람의 삶을 표현해 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을 표현하려면 그만큼 인생에 대한 성찰의 깊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나면 책도 많이 읽고, 연극 이외의 다른 공연들을 보았으며, 시간이 나면 여행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연기도 배우가 채운 만큼 나온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라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다양한 체험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공인이라는 생각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대중들의 호응과 인기를 얻어 살아가는 직업이기에 그의 모든 언행이나 가정 생활에서 남들보다 훨씬 더 조심하고 모범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가끔 배우들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공인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처음 연극을 배우러 일본으로 유학을 갈 당시 배우라는 직업이 사회적으로 심한 천대를 받았는데,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의 사생활이 상당히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배우가 되면 사생활에서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이렇듯 나는 내가 배우라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고, 그렇기에 그 이름을 훼손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철저히 해온 까닭에 배우 생활 60여 년 동안 불미스러운 스캔들 한 번 일어난 적이 없었다. (……) - <미수의 커튼콜>, 김동원, 태학사, 2003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김일영, 대한민국예술원, 2000 <우리시대의 연극인>, 서연호, 연극과인간, 2001 <국립극단 50년사>, 김성희, 연극과인간, 2003 ‘증언으로 찾는 연극사 2’, 김미도, <한국연극>, 한국연극협회, 1992년 6~7월
연계정보
-토막
-원술랑
-마의태자
-이성계의 부동산
-김약국의 딸들
-소
-포기와 베스
-신극협의회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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