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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吳泳鎭)

예술가명
오영진(吳泳鎭)
전공
극작
개요
오영진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문학, 정치, 영화, 연극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전천후 예술인이었다. 따라서 오영진의 삶은 크게 정치가, 사상가로서의 면모와 문학, 영화, 연극 발전에 기여했던 예술인의 모습 두 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오영진의 부친 오윤선은 일제치하의 민족자본가로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 등과 민족운동의 호흡을 함께했던 인물이다. 평양 계리에 있던 그의 집은 민족지도자들이 밤낮으로 화합하고 기거하는 아지트였다. 이러한 성장환경의 특수성 때문인지 그의 민족정신은 각별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불리던 그가 당시로서는 큰 인기가 없었던 조선어문학과를 선택했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해준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우리 조상이 남겨준 문학과 사상적 유산의 목록조차 알 길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그는 말한다. 해방 이후에는 조만식을 도와 조선민주당 창당에 도움을 주고 중앙상임위원이 된다. 조만식의 측근이자 비서로서 그의 위치는 상당했다. 이후 공산당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오영진의 민족주의 사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전통의 수용과 재창조라는 형식으로 표출된다. 연극평론가 이미원은 오영진 작품의 이러한 경향에 대해 “그는 현대 정치와 사회를 반공·민족주의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고발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건전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으며, 사회 문제의 핵심을 통관하고자 했다. 즉 현대사회를 다루되 민족적 주체를 세우고자 했다는 점에서 고전 전통의 수용작업과 맥이 이어진다”고 정리한다. (<한국현대극작가연구>,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3)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혼상제 및 구비설화를 모태로 한 의례 삼부작과 고전소설을 모태로 한 시나리오 <꿈>, <심청> 및 희곡 <허생전>이 있다. 의례 삼부작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한네의 승천>은 모두 시나리오로 발표되어 영화로 제작되었다. 한편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오곡타령>, <무희>와 같은 작품은 전통소재 작품들보다 문학성과 철학성에 기반하여 민족주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59세의 나이로 오영진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졌을 때, 그의 장례식을 연극인장으로 할 것이냐, 영화인장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던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한국영화에 끼친 공로 또한 만만치 않다. 오영진이 영화와 관련을 맺은 일로는 시나리오 집필, 영화제작, 영화평론 활동을 들 수 있다. 시나리오는 앞서 언급했던 <배뱅이굿>, <맹진사댁 경사> 등 모두 12편이다. 1955년 우리영화 중흥기에 제작된 최초의 동시녹음영화 <주검의 상자>(감독 김기영의 데뷔작품)를 USIS(미국공보원)와 공동으로 제작한 것도 한국영화사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오영진의 영화이론은 과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정평이 나 있었다. 예술가, 정치인 오영진의 고고한 성품, 오리지널만을 고집하는 작가적 자세, 결벽증 등은 지금도 유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이러한 고집과 결벽증으로 그를 멀리하는 예술인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외고집, 비타협성이 없었더라면 그가 살았던 그 시대에 주옥 같은, 위대한 작품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생애와 약력
1916년 평양부 계리 출생 1928년 양정사립고등보통학교 입학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항일시위 참가 1933년 양정사립고등보통학교 졸업 /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예과(문과) 입학 1935년 예과 수료 후 경성제대 조선어문과에 진학 1936년 <성대문학(城大文學)> 창간 / 극영동호회 조직 1938년 경성제대 졸업 / 일본으로 가서 동경발성에서 영화 수업, 조감독 생활 1940년 귀국, 평양 백선행 기념관에서 조만식의 주례로 김주경 여사와 결혼 / 부친이 경영하는 숭인상업학교 강사 겸 이사장의 비서 / 조선영화주식회사 문예부 촉탁 / 법인 조선영화사 촉탁 1942년 상업에서 교명이 숭인공업학교로 바뀐 부친의 학교에서 강사 1943년 조선인 학도지원병제 반대운동에 관련되어 매형, 조카 등과 함께 검거 1945년 자택에서 조만식 선생을 위원장으로, 부친 오윤선 장로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 /서울에서 조선영화건설본부 조직 / 평양에서 예술문화협회 조직 주도 / 미군정청 설치광경 현장취재와 촬영 /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 및 조만식 당수의 비서로 일함 1946년 숭인중학교 강사 복직 1947년 해주 경유 서울 도착 1948년 공산당 테러리스트에게 권총 피습 1949년 공보처 소속 대한영화사 이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 중앙위원 피선 / 연극학회 창설, 간사에 취임하여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개최 / 한국문화연구소 창설, 기획위원으로 취임 1950년 서울예술학원 강사로 취임 / 오리온영화사 창설, 영화제작에 관여 / 6·25전쟁 발발과 함께 국방부 정훈국과 제휴하여 한국문화연구소 내 비상국민선전대를 설치하여 서울피점 직전까지 기획위원으로 종사 / 국방부 정훈국 영화반 및 해군 정훈감실 위촉 / 평양수복 후 평양으로 가서 조선민주당 재건에 착수하고 평양문화단체총연합회 조직, 위원장에 취임 / 서울문화인과의 사무연락 차 단독으로 귀경 1951년 서울국립대학(전시 연합대학) 강사로 취임 / 한국시청각교육회 조직, 상임간사로 취임 / 문총 사무국 차장에 취임 1952년 남하한 이북출신 문인, 예술인을 규합하여 문총 북한지부 조직, 위원장에 취임 / <문학예술> 창간 / 출판사 중앙문화사 창립 / 유네스코 주최 세계예술회의(베니스)에 한국대표로 참석 1953년 한국영화예술협회 창립 /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도미, 3개월간 대학, 미술관, 연극, 영화, 라디오계를 방문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가입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피선 1955년 서울로터리클럽에 가입 1956년 사단법인 한국영화문화협회 상무이사로 취임 / 금룡영화상 위원장 피선 1958년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부위원장에 피선 / 피난민 정착지 시찰 /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에 취임 / 동부 휴전선 시찰 / 시네마펜클럽 회장에 피선 / 흑산도, 태도 일대 시찰 1959년 국제극예술협회 제8차 총회(헬싱키)에 한국대표로 참석 / 하버드대 하계 국제세미나에 참석 1960년 문교부 저작권 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 / 국립극장 운영위원으로 피선 / 영화윤리규정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피선 /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참석 1961년 제8회 아시아영화제(마닐라) 심사위원으로 피선 / 국무총리 문화담당 특별고문으로 위촉 /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 / 국가재건최고회의 문교·사회분과 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위촉 / 한국반공연맹 회원 1962년 로터리클럽 연차총회 참석차 도미 / 한국민주당 창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피선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선 1963년 동아연극상 및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위촉 1964년 평양시민회 부회장에 피선 / 조선일보 주관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에 위촉 / 서울시 문화위원으로 위촉 196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위촉 1966년 국제대학 국문학과 주임교수로 취임 1968년 국제대학 교수직 사임 1974년 타계
상훈
1956년 시나리오 <시집가는 날> 문교부 최우수 시나리오상 수상 1958년 아시아영화제 <시집가는 날> 최우수 희극상 수상
작품활동
1942년 시나리오 <배뱅이굿>(영화화, <국민문학> 발표) 1943년 시나리오 <맹진사댁 경사>(영화화, <국민문학> 발표) 1949년 희곡 <정직한 사기꾼>(정치대학 공연) / 희곡 <살아있는 이중생각하>(극예술협회 공연) 1950년 시나리오 <사나이의 길> 1951년 뮤지컬 <오곡타령>(미발표, 일명 <꿈나라의 꽃동산> 개작 공연) 1955년 <아리랑>(대사, 영화화) 1956년 <인생차압> 신협 공연 1957년 <여성전선>(영화화) / 시나리오 <춘향전>(미발표) / 시나리오 <청년>(<문학예술> 발표) 1958년 <인생차압>(영화화) / 시나리오 <종이 울리는 새벽>(<사상계> 발표) 1959년 <10대의 반항>(영화화) / 시나리오 <꿈> / 시나리오 <하늘은 나의 지붕>(<사상계> 발표) 1962년 시나리오 <심청> 1964년 라디오 드라마 <비바리 서울에 오다> 1965년 <살인명령>(영화화) 1967년 희곡 <해녀 뭍에 오르다>(자유극장 공연) / 뮤지컬 <시집가는 날> 1970년 희곡 <허생전>(실험극장 공연) / 희곡 <아빠빠를 입었어요>(서울대 공연) / 희곡 <모자이크 께임>(<신동아> 발표) / TV드라마 <도산 안창호> 1971년 희곡 <나의 당신>(<현대문학> 발표) 1972년 <한네의 승천>(영화화, <현대문학> 발표) 1973년 희곡 <동천홍> 1974년 희곡 <무희>(유작) / 싸이코드라마 <며느리>, <부부>, <누나> 등
대표작품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맹진사댁 경사> <해녀 뭍에 오르다> <무희>
저서
<하나의 증언>, 오영진, 국민사상지도원, 1952 <장막희곡 7인선>, 오영진 외, 성문각, 1967 <시집가는 날: 맹진사댁 경사>, 오영진, 극단 실험극장, 발행년도 불명
리뷰
<맹진사댁 경사>는 오영진의 대표작이자 민족정서를 표현한 극으로 높이 평가 받아왔다.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연구자들이 구체적인 작품분석을 통하여 해명하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전통수용 문제에 대하여 천착하였으며, 그 결과 ‘구렁덩덩 신선비’ 설화, ‘춘향전’, ‘단군신화’와의 관련성 등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었다. 여기서 1943년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소재를 작품의 근간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소극적인 경우와 적극적인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소극적인 경우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하여 친일적인 목적극만을 작품의 소재로 취할 것을 강요당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일제 말 군국주의 하에서 아무 것도 쓸 수 없어서 <맹진사댁 경사>와 <배뱅이굿>을 썼다”는 오영진의 증언에 비추어 보아 현실에서 소재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정도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전통의 추구이다. 오영진이 전통과 민속적인 것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있었음은 그의 자전적인 수필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전통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켜 전통적인 소재를 작품화함으로써 민족의 원형적인 심성과 고유의 사상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의미 있게 생각한 것이다. 특히 <맹진사댁 경사>에서는 세상에 유전하는 민담을 작품의 소재로 삼음으로써 공동의 민족의식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맹진사댁 경사>를 지속적으로 개작하고 무대화·영화화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또한 결과적인 측면에서도 <맹진사댁 경사>가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친숙하게 향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오영진의 민족의식의 추구는 일면적으로는 성공했다 할 것이다. (……) -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 연구’, 손화숙, <한국극예술연구> 4집, 1994 (……) 이와 같은 우리의 연극사(희곡사)적 흐름을 개화기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통시적으로 살펴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됨과 동시에 오영진의 희곡사적 위상의 자리가 드러나게 된다. 첫째는 정치적 변화와 영향에 좌우되었다는 점이다. 출발 당시부터 비정상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전통극과 접맥되지 못했으며, 정치환경의 변화에 따라 전진과 후퇴가 되풀이되었던 것이다. 둘째는 극작가를 포함한 연극인들의 사상과 사명감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예술철학은 물론이거니와 민족관 또는 조국관마저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연극발전을 위해 꾸준한 탐구의 노력을 다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상업주의로 안착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셋째는 연극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연극을 이룰 수 있는 요소들 즉 창작희곡의 문제, 유능한 연출자 및 배우의 문제, 조건이 갖추어진 공연장 확보의 문제, 연극예술을 선도해나갈 이론적 뒷받침과 비평의 문제 그리고 양식 있는 관객의 확보 문제들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여건과 함께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연극은 답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의 연극문화가 소포클레스라든가, 셰익스피어, 쉴러, 입센 같은 천재들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듯이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재효라든가, 김우진, 현철, 박승희, 유치진, 오영진, 차범석 등 유능한 인재가 있었기에 우리의 연극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오영진 연구>, 한옥근, 시인사, 1993
창작노트
(……) 선배들은 새로운 모든 것을 왕성한 식욕으로 소화 흡수하면서도 그들에게는 어린애처럼 단순하고 직선적인 불꽃 튀기는 정열과 소박한 믿음이 있었다. 이것으로 그들은 이 땅에 민족 전체를 위한 빛나는 유산이며 공유재산인 자유와 평등과 자유 독립을 향한 불멸의 등대를 높이 세웠다. (……) 우리들의 베이스캠프를 민족정신의 반석 위에 설치하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명확하고 선명하게 오늘의 가상(假象)을 꿰뚫어 보게 하며, 더 높은 정치적 원을 향하여 우리의 날갯죽지를 크게 펴게 하는 기본적 작업이 아닐 것인가? 이에 이르러 우리는 비로소 첫째 민주국가로서의 주체성을 굳건히 하고, 둘째 민족의 도의심을 높이고, 셋째 국민의 안정을 보장하여 나아가서는 조국의 민주통일을 완수하기 위한 물질적, 정신적 태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닌가. - ‘운명과 기회’, 오영진, <사상계>, 1969년 5월호
관련도서
<오영진희곡집>, 국제극예술협회한국본부편, 동화출판공사, 1976 <오영진전집>, 이근삼·서연호 공편, 범한서적, 1989 <오영진연구>, 한옥근, 시인사, 1993 <우리시대의 연극인>, 서연호, 연극과인간, 2001 <한국현대극작가연구>,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3
연계정보
-맹진사댁 경사 (시집가는 날)
-집 없는 천사
-인생차압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해녀 뭍에 오르다
-허생전
-시집가는 날
-십대의 반항
-한네의 승천
-국립극단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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