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촌선생

작품/자료명
촌선생
초연장소
부민관
작/연출
이광래
장르구분
1920년-1940년대
내용
주인공 송선생은 20년 전 도시에서 귀향한 인물로 고향의 발전을 위해 사재를 털어 야학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에서 소학교 선생을 하던 장남 달훈과 유치원 보모 출신의 아내 성희가 귀향하는데 그들은 농촌생활에 대해 다분히 환상과 허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온 농촌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여 농사꾼들은 하나 둘 농토를 버리고 북간도로, 일본으로 떠나가는 참이다. 농촌을 떠나가는 농민들과 함께 빚 때문에 팔려가는 처녀들, 도시를 동경하여 떠나가는 처녀들도 수두룩하다. 그녀들에겐 도시에서 온 성희나 진흥농장 서기인 영석의 첩 숙정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성희와 숙정은 서울 출신이라는 이유로 단짝이 되어 시골 사람들을 괄시하고 무시한다. 시골로 내려와 ‘대지주의 퀸’이 되려했던 성희는 금세 시골 생활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달훈 부부에 비해 차남 달근과 약혼녀 옥정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지극한 커플이다. 그러나 달근은 형의 혼사 빚 때문에 입도차압을 당하게 되고 야학교까지 처분해야 할 형편에 놓이자 소를 팔아 대판으로 떠나고자 한다. 송선생은 결국 달훈 내외를 서울로 돌려보내고 달근, 옥정과 함께 끝까지 고향을 지키기로 한다. 참고: <한국 근대극의 재조명> 김미도, 현대미학사, 1995.
예술가
이광래 (1908~1968) 경남 마산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이다. 본명은 흥근이다. 배재고보를 졸업(1928년)하고 일본 동경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영문학부를 중퇴하였다. 귀국 후 조선일보, 중앙일보에 근무하면서 극예술연구회 극작 연출부에 참여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촌선생>이 당선되면서 극작가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중앙무대’를 조직하여 연출가로도 활동하였다. 1945년에는 극단 ‘민예’를 조직하였고, 1947년 한국무대예술원 예술국장, 한국연극학회 간사장, 신극협의회 간사장, 극단 신협 대표, 극단 극협 대표, 한국문학가협회 희곡분과위원회 위원장, 한국연극연구소 상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서라벌예대 연극영화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었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1965년 5월 문예상,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9년 삼일연극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대수양>(1959년) <고도있는 인간광장>(1962년) 등이 있다. 유치진 (1905~1974) 경남 통영 출생의 극작가이며 연출가, 연극평론가이다. 호는 동랑(東朗).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도일,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31년 서항석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주도한다. 1931년 희곡 <토막>을 ‘문예월간’지에 발표하고, 계속해서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933년), 장막희곡 <소>(1935년) 등을 발표하였다. 그 후 사회성을 배제한 낭만적인 작품들인 <자매>(1936년) <마의태자>(1937년) <부부>(1940년) 등을 발표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국민연극운동을 벌여 자신이 친일작품으로 인정하는 <흑룡강>(1941년), 친일의 선봉 이용구를 찬양한 <북진대>(1942년) 등의 희곡을 쓰고 공연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자명고>(1947년) <원술랑>(1950년)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사극과, 반공을 주제로 한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년) 등의 역작을 발표하였다. 이후 극작과 연출, 평론 활동을 계속한다. 초대 국립극장장, 반공통일연맹 이사,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1965년에는 드라마센터를 창립하여 사실극 성립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울시문화상·예술원상(195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서훈(1962년), 문화공보부 3,1연극상(1967년), 문공부장관 공로장(1970년)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품 <토막>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소> <원술랑> <마의태자> <나도 인간이 되련다> <춘향전> <왜 싸워> <한강은 흐른다> <촌선생> <도념>
평론
<촌선생>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그 해 4월 극연 제10회 작품으로 새로 개관한 부민관에서 관객 5,0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되었다. 아버지 송선생(촌선생으로 불리운다)과 아들 형제(달훈, 달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농촌극이다. 부자간 갈등을 통해 당시 농촌 현실 문제를 폭넓게 제시하려 했다. 등장 인물의 성격 설정이 분명하고,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서정적이고 극적인 분위기 조성과 상황 처리가 잘 이루어져 있는 점에서는 세련미를 보인다. (<우리연극 100년> 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부민관이 외부 예술단체들에 대관을 시작한 것은 1936년 4월부터였다. 당시의 유일한 정통 신극단체인 극예술연구회가 제10회 공연을 부민관 무대에서 했다.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으로서 연출을 전담했던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옮긴 뒤 유치진이 연출과 희곡창작을 도맡아 하다시피 했고, 신진 작가들을 키워내기 시작할 때 부민관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극예술연구회의 처음 진출에는 이광래의 <촌선생>과 이서향의 <어머니>를 갖고 나갔다. 그 첫번째 공연은 비록 신진작가들의 데뷰작품이었지만 무대조건 등으로 해서 그런대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출판부, 1996)금번 조선의 진실한 극문화 수립을 목표로 하고 5년의 시일을 두고 꾸준한 노력으로서 문자 그대로 형로와 암초우를 용감히 고군분투하여 걸어나오는 극예술연구회가 그 제10회 공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들 조선의 극작가들로서 빚어진 순창작극만을 상연한 것은 가장 의의있고 정당하다고 확신함을 주저히 않으며 나아가서 필자로서는 조선의 진실한 극문화 향상을 위하여 최대의 찬사를 애끼지 안는 바이다. 하물며 금번 약 2천명이 수용된다는 부민관에 연 3회 계속적으로 대만원을 이루웠다는 큰 성과를 얻었음에랴! … 이광래작 <촌선생>(전3막)은 자기 향토를 지키자는 주제로 조선농촌의 복잡한 실정미를 단편적으로나마 다분히 가지고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많은 호의를 가지게 하는 조선극작계로서는 가작의 부류에 들 작품이라고는 하겠으나 주제와 제재가 상합하지 못한 점이 이 희곡의 치명상이다. … 그러나 이 희곡 자체의 모순과 부득이 삭제를 당한 개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대호평을 받은데 대하여는 이 희곡의 제재인 농촌사정이 무내용하나마 조선의 현대 뿌루·인테리층의 자부심과 유한심리와 영합한 관계도 있겠지만 연출자 유치진씨의 공적도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연 제10회 공연을 보고(上,中,下), 동아일보 1936년 4월 14일~16일, 이운곡)
관련도서
<한국 현대 희곡 작품론> 정신재, 국학자료원, 2001. <한국 근대극의 이론과 연극성> 신아영, 태학사, 1999. <한국 근대 연극사> 유민영, 단국대출판부, 1996. <한국 근대극의 재조명> 김미도, 현대미학사, 1995.
연계정보
-극예술연구회
-이광래(李光來)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