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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춤의 무대화와 외래춤 도입

19세기말 한국의 문호 개방과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다른 문화예술과 마찬가지로 무용도 정상적인 발전을 꾀하기 어려웠다. 그런 중에서도 시민 사회를 향한 시대의 변화 물결을 타고 춤추는 공간 즉 무대에 변화가 있었고 나름대로 춤을 진흥시키려는 시도도 행하여졌다. 1899년 서울의 아현(阿峴) 등지에 무동연희장(舞童演戱場)이 세워져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한다. 이런 사설·가설·무대형의 공연장보다 훨씬 비중높게 받아들여진 것은 1902년 서울 광화문에 세워진 관립극장 협률사(協律社)였다. 협률사는 한국 최초의 근대 공립 극장이었으나 1908년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민간 극장으로 임대되어 원각사(圓覺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협률사는 한국 최초의 정면 액자 무대(프로시니엄 아치 스테이지)와 막을 갖추고 여성들로 전속 단체를 구성하였으며 그 후 남녀 명창과 무동을 추가 선발하여 단원이 170명에 이르렀다. 1902년 12월 협률사에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라는 공연이 올려졌다. 이 공연 내용은 명창·기생·무동의 솜씨로 엮은 소리와 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 활동 사진(영화)과 춤 등을 올려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원각사로 개명하고 나서는 구태의연한 창작물 수준과 내외 정세 변화로 인해 1914년 폐관되었다. 협률사 이외에 당시 서울에는 1903년-1907년 사이에 광무대·연흥사·장안사·단성사 등 민간 옥내 극장들이 세워졌다. 이들 극장에서는 창극, 민속 연희, 영화 등이 올려지다가 1907년부터 춤도 올려지고 1910년대에 가면 춤공연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잡는다. 당시 이들 극장에서는 궁중 정재를 재현하거나 모방·창작한 춤과 민속춤이 공연되었다. <지구무>처럼 외래 문물이 밀려드는 시대를 반영한 춤, <전기광무>처럼 나비가 추는 형태미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춤은 인기가 높은 레퍼토리였다. 이즈음의 개화기에 전혀 새로운 무대 공간에서 춤의 양식도 변화가 있을 법하였으나 새로운 양식으로 주목할 춤은 없었다. 이 당시에 춤을 주도한 측은 기생 조합(妓生組合)이었다. 조선 왕조 궁중의 장악원 출신자들은 1908년부터 기생조합소를 결성하여 조선 왕조가 무너진 뒤 무용 교육과 공연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1914년 한 신문이 장기간 연재한 인기 연예인 소개 기사에 따르면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인기인 가운데 기생이 90명을 차지할 만큼 기생의 비중은 컸다. 기생들은 공연예술인으로서 처음에는 민속춤뿐만 아니라 궁중무를 대중 앞에 당당한 레퍼토리로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1917년 가을에는 서울의 4대 기생 조합이 근 두달간 번갈아 가며 공연을 하였고 11월에는 합동 공연도 가졌다. 그 전의 단성사 공연에서는 관객이 운집하여 극장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도 있었다. 기생 조합에서는 궁중무와 민속춤을 중심으로 서양춤과 일본춤도 가르쳤다 하나, 레퍼토리의 양식은 전통춤을 각색한 정도에 머물렀다. 동시에 1913년 일본의 덴카스곡예단이 내한해서 초보적인 발레와 레뷰춤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영화관들에서도 영화 막간에 간략한 서양춤을 선보였다. 상류층의 모임에서도 외국 사교춤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외래춤이 서서히 밀려들던 이 시기에 특히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동포들이 러시아 춤과 음악을 갖고 서울에서 공연하여 엄청난 인기를 모았으며 이런 추세는 192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가운데 몇 사람은 무용 학원과 자주 강습회를 열어 서양춤을 보급하였다. 개화기부터 1925년까지 국내의 춤 공연은 전래의 춤을 각색한 것과 외래의 사교춤을 소개하는 것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이 둘 간의 교류나 양식적 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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