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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음악사의 대들보

한국음악계의 구도는 연주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음악계 시스템도 그렇고, 한국인의 음악적 사고도 그렇고, 대학의 음악교육도 그렇다. 그와 동시에 짧은 시간 안에 외래음악의 일종인 양악이 이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또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한국 근현대음악의 대들보 역할을 한 김순열(1920~), 박민종(1918~), 백낙호(1929~), 김영의(1908~1986), 김원복(1908~2002), 정희석(1917~), 전봉초(1919~2002) 등과 같은 연주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악분야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외국 유학을 통하여 기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였고, 귀국 후 연주자로서 무대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대학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양의 수준 높은 기악곡의 수용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한국 기악 교육의 기틀도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운동도 이들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 이들의 개인적 업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순열은 피아노 독주자, 반주자, 실내악 연주자 그리고 피아노 교육자로서 한국 음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광복 직후 활동한 유일한 남자 피아니스트였으며, 비록 완주는 못했지만, 최초로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 완주 독주회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피아노 독주자로서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전곡과 수많은 프랑스 가곡을 초연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초창기 실내악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48년부터 약 40년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피아노 아카데미즘을 제창하였고 또 그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수많은 피아노 인재를 양성하였다. 일생을 피아노 연주와 교육에만 전념한 순수한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박민종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작곡가, 교수로서 한국 근현대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주로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외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을 하였는데 일본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동경예술대학 강사를 역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한국인 최초로 직업 오케스트라인 오케스트라 드 파리의 정식 단원으로 활동을 하였고, 독일에서는 외국인 최초로 W.S.O 교향악단의 단장으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수많은 협연을 하였고 또 자신이 편곡한 한국음악을 유럽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1971년 귀국,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거쳐 이듬해부터는 서울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바이올린 연주와 교육뿐만 아니라 실내악 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한국음악계의 국제화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한국음악학회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한국음악의 학문적 발전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노년에는 한국정서가 풍만한 자작곡을 여러 편 발표하기도 하였다. 백낙호는 피아니스트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와 학장,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과 이사장, 한국피아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피아노 교육 및 한국음악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9년부터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수많은 연주회를 개최하였고, 1963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서 피아노 교육 및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피아니스트를 배출시켰다.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개최하였으며, 런던국제피아노콩쿠르, 더블린국제피아노콩쿠르, 국제 듀오피아노콩쿠르 등 국제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베토벤 소나타전집 편집과 교정판>과 음반으로는 <백낙호 피아노 독주곡집>을 남겼다. 김영의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인 명문인 줄리어드음악학교 출신으로,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로 시작하여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약 40년간을 여성 음악교육과 한국음악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을 오늘날과 같이 명문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1948년부터는 예술대학의 전신인 예림원 원장으로, 1954년부터는 예술대학 학장으로, 1960년부터는 음악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여성전문음악인을 양성하는 음악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만들었고 또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여성음악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피아노 전공이지만, 국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수차례의 외국 유학을 통해 작곡과 음악이론, 음악교육 등 음악의 이론과 실기를 두루 섭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음악교육기관의 상을 정립시켰다. 김원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피아니스트이자 최초의 여류 피아니스트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어린 나이에 피아니스트로 데뷔를 하여 192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쳐 중요음악회의 피아노연주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였으며, 수많은 곡을 초연하였다. 광복 후에는 고려교향악단 피아노 주임을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수많은 피아니스트를 양성하였으며, 연주자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2002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연주를 하여 16세에 첫 연주를 한 이래 약 80년간을 연주가로서 활동을 하였다는 대기록을 남겼다. 한국의 피아노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아노 연주와 교육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희석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음악발전에 공헌을 하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는 1944년 제1회 독주회를 개최한 이래 10회의 독주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중 5회는 타이완에서 개최를 하였다. 매회 독주회 때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또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에 힘쓰는 한편 한국적 레퍼토리 개발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일환으로 한국가곡을 바이올린 곡으로 직접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하였다.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이화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고, 1967년 연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는 연세오케스트라를 창단하는 등 대학 오케스트라 창단에 산파 역할을 하였으며, 또 직접 지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 바이올린 전공 교수로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전봉초는 우리나라의 첼로 분야와 실내악 분야를 개척한 개척자인 동시에 대학교수, 음악협회 이사장, 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음악예술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1948년 제1회 독주회를 개최한 이래 약 20여 회의 독주회를 개최하였고, 실험학회를 비롯하여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3중주단인 프리마 트리오, 서울대 4중주단과 3중주단, 바로크합주단 등 실내악 창단에 산파 역할을 하였고 또 실내악 운동을 주도하였다. 광복 이전에는 잠시 만주의 신경교향악단에서 활동을 하였고, 광복 후에는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교향악단에서 첼로 주자로 활동을 하였다. 1952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을 하면서 첼로의 아카데미즘 확립과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동 대학의 학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정년 후에는 음악협회 이사장과 예총 회장직을 지내면서 한국음악의 발전과 국제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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