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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한국전쟁의 영향 시기

우리 민족에게 광복은 불행하게도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지 못했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됐다. 연극계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극단 활동은 좌우익으로 분열돼 심하게 대립했다. 해방 이후 우익 진영은 ‘전국연극예술협회’(1947년)를 결성해 좌익에 대응했다. 이 조직에는 ‘신청년’ 등 12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런 조직들을 중심으로 전국 규모의 연극경연대회가 열리는 등 연극계는 해빙기를 맞이했으나 그 수준은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1940년대 후반 연극은 생경한 정치이념의 목적극과 그에 대항해 순수를 부르짖는 비현실적인 연극, 여전히 신파의 기운을 간직한 상업극이라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대학극이 생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큰 위안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연극계 최대의 사건은 국립극장의 개관이다. 국립극장은 1950년 4월 29일 일제시대 지은 부민관을 수리해 문을 열었다. 신극협의회(신협)를 전속 단체로 하여 유치진 작, 허석·이화삼 공동연출의 <원술랑>을 개관작으로 선보였다.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함으로써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담은 작품이었으나 관객들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국립극장은 한국전쟁 발발로 문을 닫은 뒤 피난지인 대구에서 운영을 재개하는 등 우려곡절을 겪어야 했다. 1953년 대구 문화극장 시절 윤백남 원작 소설을 하유상이 각색한 <야화>가 박진 연출로 공연됐다. 여진족 여인 야화의 활달한 기상을 통해 통일의 염원을 담은 작품으로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1957년 서울 명동에 다시 둥지를 튼 국립극장은 1975년 이곳이 폐관될 때가지 화려한 ‘명동시대’를 잉태했다. 국립극장 개관 등 연극에 대한 국가적 관심 못지않게 주목할만한 극단들이 모습을 보인 것도 이 무렵이다. 앞에서 말한 신협은 1946년 유치진·이해랑이 창단한 극예술협회의 후신으로, 국립극장 전속이 되면서 이름을 신협으로 바꾸었다. 전쟁기에 신협은 군부대 위문을 통해 군의 사기를 높였다. 신협이 기성극계를 대표했다면 1956년 창단한 ‘제작극회’는 신진극계를 대표했다. 이 단체는 1949년 제1회 ‘대학극경연대회’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이 모인 동인제 극단이었다. 고려대 출신 김경옥·최창봉, 연희대 출신 차범석, 서울대 출신 이두현 등이 참가했다. 이들은 ‘현대극 추구와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창의에 따른 연극 제작’을 목표로 했다. 이밖에 신무대실험극회, 청포도극회 등 다수의 동인제 극단들이 1950년대 말을 장식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근대극에서 1960년대 현대극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게 됐다. 이 시대의 대표 극작가로는 오영진(1916∼1974)이 꼽힌다. 오씨는 극작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평론가 등으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요즘도 공연되는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맹진사댁 경사>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일명, 인생차압) 등을 남겼다. 각각 전통 결혼제도의 병폐와 친일파의 만행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걸작이다. 물론 신진작가의 등장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용찬, 차범석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1957년 국립극장 장막극 공모 당선작인 이용찬의 대표작 <가족>은 부자간의 애증 관계를 심층적이며 생동감 있게 구성한 작품이다. 차범석은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입석작 <밀주>로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만년현역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1958년 제작극회가 공연한 <불모지>가 이 무렵 그의 대표작이다. 정재왈(연극평론가·LG아트센터 운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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