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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에 맞게, 제철 음식으로 차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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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9.22.

오색나물, 탕, 조기와 생선포, 기름진 전과 송편에 축구공보다 큰 수박, 아이 머리통만한 배와 사과, 감 등으로 상다리가 휘어져야 만족하고 홍동백서 운운하며 차림마저 까다로운 차례상.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조상님들은 어떤 추석을 보냈으며 그 의미를 살리는 추석 상차림이란 또 어떤 것일까? 추석의 시기를 알게 되면서 차츰 이해될 추석상의 진실. 조상들은 요즘의 화려한 상차림은 원하지 않으셨다니 과거에 SNS라도 띄어볼까요?

“형편에 맞게, 제철 음식으로 차리거라”

 추석, 조상님들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형편에 맞게, 제철 음식으로 차리거라”

 

 

오색나물, 탕, 조기와 생선포, 기름진 전과 송편에 축구공보다 큰 수박, 아이 머리통만한 배와 사과, 감 등으로 상다리가 휘어져야 만족하고 홍동백서 운운하며 차림마저 까다로운 차례상.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조상님들은 어떤 추석을 보냈으며 그 의미를 살리는 추석 상차림이란 또 어떤 것일까? 추석의 시기를 알게 되면서 차츰 이해될 추석상의 진실. 조상들은 요즘의 화려한 상차림은 원하지 않으셨다니 과거에 SNS라도 띄어볼까요?

 

"팔월이라 중추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성 자조 돌아 서천(西天)을 가리키니

선선한 조석(朝夕) 기운 추의(秋意)가 완연(宛然)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간에서 들리구나.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백곡을 성실(成實)하고 만물을 재촉하니

들구경 돌아보니 힘들인 일 공생(功生)한다.

백곡이 이삭 패고 여물 들어 고개숙여

서풍에 익은 빛은 황운(黃雲)이 일어난다.“

 

- 정학유(丁學遊, 1786~1855),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서 -

 

농가월령가_1939년에 발행된 농가월령가 가운데 정월령 

 

농가월령가_1939년에 발행된 농가월령가 가운데 정월령. 농가월령가는 해방 전부터 그 가치를 평가받았다.

한국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추석이 다가올 즈음이면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용이 쓴 <농가월령가> 제8월령이 떠오른다. 그 도입은 보는 것처럼 백곡이 무르익는 음력 8월의 절기에 할애돼 있다. 여름 농번기에 저마다 정신없이 지내다 잠깐 쉬는 틈의 흐뭇한 마음, 올해 이렇게 수확을 앞두게 됐구나 하는 안도감, 뒷산 대추와 밤을 제 차지로 여겨 신이 난 어린이까지 즐거이 노래한다.

 

이를 읊을 때 주의하여 볼 점이 있다. 음력 8월은 수확이 완료된 시기가 아니라는 것. 이때는 수확 직전이다. 그래서 잠깐 농민이 숨을 돌릴 수 있고, 여기서 읊은 대로 한 집안 주부가 친정 나들이도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추석인 음력 8월 15일은 자연과 지리와 농업의 조건이 수확이라는 큰일을 앞둔 농민에게 베푼 휴가다. 봄에 파종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 앞으로 결실이 예상된다, 한숨 돌렸다가 다시 힘내자, 본격적인 수확이 코앞이다! 이런 느꺼움이 전통적인 음력 8월의 감각이다. <농가월령가> 제8월령은 이때의 밥상을 이와 같이 노래한다.

 

“북어쾌 젓조기로 추석 명일 쇠어 보세.

신도주(新稻酒) 오려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신도주며 오려송편은 완성된 수확의 결과가 아니다. 그 즈음 막 나온 조생종 또는 극조생종 벼, 또는 덜 여문 벼에서 낸 쌀로 하늘이 베푼 휴가철의 별식을 마련한 것이다. 곁들인 음식은 일 년 내내 먹는 저장 식품인 북어와 젓으로 담근 조기이다. 한 해 가운데 한 고비, 한 매듭에 조생종 벼를 조금 베어 술을 빚는다. 준비할 수 있는 만큼의 떡을 빚어 찐다. 막 나온 재료로 나물과 국을 마련해 조상님께 올리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소박하면서도 풍성하고, 그야말로 사람 사는 것 같다.

 

조상에게 아뢰는 제물이라고 특별할 것 없다. 마련할 수 있는 음식 중심으로 소박하게 차릴 뿐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 선생은 당신이 쓴 유학 교과서인 <격몽요결>에서 차례의 제물을 차릴 때 ‘형편에 맞게’ ‘제철 음식으로’ 차리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격몽요결 제의초에서_율곡 이이는 제물을 차릴 때 형편대로 마련하라고 했다 

 

격몽요결 제의초에서_율곡 이이는 제물을 차릴 때 형편대로 마련하라고 했다.

차례에는 제철 음식을 쓰라고 했다.

일본 동양문고 소장

 

 

조율이시(대추, 밤, 감, 배의 순으로 놓기),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좌포우해(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어동육서(생선은 동쪽에, 육류는 서쪽에) 같은 소리는 유학자가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전통적인 명문가일수록 이런 데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디서 나와 누가 한국인에게 퍼뜨렸는지 종잡을 수 없는 소리다. 조선 예법의 뿌리이자 뼈대가 된 주희의 <주자가례>에도, 이후 조선 사람이 엮은 예서인 <사례편람>에도 음식이며 과일의 형상과 빛깔을 특정한 적이 없다. 예를 든 모든 책이 제물 차리는 첫 줄에 과일을 놓는 쯤의 안내에서 그칠 뿐이다.

 

사리가 그렇다. 과일의 종류도 그때그때 유동적이었다.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에는 편찬자서유구의 당대에 “귤이 근래에는 손님상과 제사상에도 오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전에는 귤을 차례상에 올리는 일이 흔치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과일 매점매석으로 큰돈 번 이야기가 나오는 박지원의 <허생전>은 제수용 과일로 “대추,밤,감,배,석류,귤,유자”를 손꼽는다. 오늘날과는 또 사뭇 다르다.

 

다시<농가월령가> 제8월령으로 돌아가자. 친정 가는 여성은 친정 부모님 드릴 기쁜 마음으로 개고기 수육을 삶고, 떡을 빚어 고리에 담았다. 차례상에 담기고 이웃과 나누는 음식이란 연중 처음 시험 삼아 거둔 벼로 낸 술, 저장 식품 몇 가지, 마침 나왔다면 밤과 대추, 제철의 박과 토란, 조금 더 준비한다면 떡 한 고리. 이쯤이었다. 차림은 소박하되 내 생명의 근원과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마음은 깊었다. 어린이도 주부도 웃으며 쉬는 때였다.

 

이즈음의 상차림이 연원을 알 수 없는 예법 아래 놓인 때가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알 수 없는 예법 때문에 수입 농수산물과 약품으로 처리해 억지 웃자라게 한 과일에 소비자도 농민도 붙들린 명절, 여성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명절이 모두의 행복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온 나라가 우우 따라다닌 예법 아닌 예법이 저물 때도 됐다. 그보다는 문화와 역사 및 공동체와 이웃을 돌아보고, 농어업 생산에 감사하고, 먹을거리 앞에서 겸손할 줄 알고, 이즈음을 모두의 휴식으로 삼겠다는 마음이 절실하다. 이제 마음부터 바꾸어야 할 때다.

 

 

[메인 이미지]

-  송편 이미지 ⓒ 위키미디어

 

- 글 고영(음식문헌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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